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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군 탑
십삼도창의군은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의병부대이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활발한 의병운동이 재개되는 가운데 9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활약하던 이은찬(李殷瓚) · 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의병 500명을 모집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문경으로 거유(巨儒)인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그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뒤 사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김세영(金世榮)을 서울로 잠입시켜 격문을 등사해 각국 영사관에 전달함으로써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였다.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 · 지평(砥平) · 춘천을 횡행하며 8도의병 규합에 진력하면서 각 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띄워 11월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군은 ‘13도창의대진소’를 설치했으며,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편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3도의병 총대장 이인영 그 배하에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진동창의대장 허위(許蔿), 아장 박정빈(朴正斌),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이었다. 그리고 총병력은 1만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는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해산군인 3,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원수부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으로 개편되었다. 개편 후의 의병장은 모두 양반 유생 신분으로서 천민 출신의 용장인 신돌석이 배제되었다. 또한 홍범도(洪範圖) · 김수민(金秀民) 등 평민 출신 의병장이 연합전선에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이 13도연합의군이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 진격을 목표로 설정하고 진격을 개시해 경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통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떠났다. 제2대 총대장이 된 허위는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화력의 부족과 일본군에게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아 결국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의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이로써, 13도창의군은 완전 해산해 각기의 연고지로 돌아가 독자적인 의병활동으로 환원하였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잡혀 9월에 순국함으로써 3년 종상(終喪: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의 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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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규 구 묘
김정규(1993 - 1960)는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3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혼춘(琿春)지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朴兌恒)·한수현(韓秀鉉)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黃炳吉)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인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高日燮)·안태국(安泰國)·김한익(金漢益)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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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근 기념비
손명근(1871 - 1942)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高陽郡纛島)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길림성 관전현에서 박장호(朴長浩)를 도총재(都總裁)로 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과 함께 동년 11월 국내에 파견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 각군과 면에 그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만주와 국내가 서로 연결하여 독립은 목적으로 하는 선전문을 인쇄 배포하고, 단원 및 군자금을 모집함과 아울러 독립군이 국내 진공시 무력항쟁에 호응하도록 하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고 김기한 등을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에 그는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 보낼 '격고국내진신사림(檄告國內縉紳士林)'이라는 격문을 비롯하여 '경고 국내동포중 왜인 관리자', '경고 국내 경향 각부호' 등 인쇄물 다수를 볏자루에 넣어 자기 집으로 보내 보관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총기관인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각도, 군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1920년 말까지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인쇄물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6월 30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도록 예심판결을 받았으나, 동년 9월 30일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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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항일 독립운동의 위대한 여정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울산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발자취를 기억하며, 미래 세대에 계승할 역사를 기록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울산에서는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에 일어난 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발맞춰 울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울산 사람들은 1910년대 국내 항일 투쟁의 상징인 대한광복회를 비롯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울산과 국내 각지에서 다양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중국 관내, 미주, 일본 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의식을 복돋았으며, 항일 무장 투쟁에도 참여하였다. 기념탑은 남구 달동문화공원 내 부지 800㎡에 총사업비 5억8천400만원이 투입돼 조성됐다. 기념탑 둘레에는 고헌 박상진 의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서훈을 받은 울산 출신 항일 독립유공자 102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탑 후면에는 울산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기록해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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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묘
이종근(1897 - 1957)은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 등의 청년회 간부 및 박영하와 그의 집에서 몇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이종욱·이문조·박영하 등과 함께 그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이종욱·이종룡(李鍾龍) 등 14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이문조·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곽남부락(郭南部落)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최현구(崔鉉久)·황정달(黃丁達)·백봉근(白鳳根)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다음날의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이튿날 오후 3시경,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주재소 앞에서 모여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을 무렵, 울산으로부터 13명의 일본 군경 응원 출동하여 이문조 등 9명의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이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칼을 든 일본 군경에게 달려들자, 일본군 수비병이 발포를 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일본군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2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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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룡 묘
이종룡(1899 - 1986)은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비밀청년회 간부인 이현우(李鉉禹) 등과 함께 혈서로 「결사보국(決死報國)」이라 서명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 오후 9시경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정에서 학생들을 규합,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가 중단되고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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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집
서진문(1900~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을 앞두고 횡빈경찰서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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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흉상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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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묘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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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호수공원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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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집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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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소개비
광복회소개비는 대한광복회의 설립과 활동 및 회원 목록을 알리는 사적이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했으며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1918년 총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다수의 회원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독립운동조직이던 대한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