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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기념탑(탑골공원)
탑골공원은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만들어진 시기를 두고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고종 연간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 [John McLeavy Brown, 柏卓安]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하였다. 탑골공원은 3.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79년 3.1독립운동 60주년을 맞아 공원을 정비해 넓혔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에 이름을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이 일대는 세조(世祖) 때 세운 원각사 터로서 이곳에는 현재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고, 3.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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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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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용운당 대선사비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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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본부 표지석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죽자 부회장 권동진이 그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하였다.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 대회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그 동안 기선을 제압당했던 사회·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그 골자는 간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집행위원제로 중앙의 권한을 학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해,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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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거터
김상옥(1889 - 1923)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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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종로 YMCA)
기독청년회관(YMCA)이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임을 표시하는 표지석이다. YMCA 회관은 3·1운동 당시 학생YMCA가 중심이 된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각종 민족운동 집회가 개최된 장소이다. 학생단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의 중앙YMCA 간사 박희도가 회원모집을 명목으로 소집한 대관원모임에서 태동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 사이에 독립운동 추진에 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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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순교 터 표지석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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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윤동주문학관)
윤동주(1917 - 1945)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이며, 어머니는 김룡(金龍)으로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아우 윤일주(尹一柱)와 당숙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는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柳玲),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張德順), 고향 후배 문익환(文益煥),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김형석(金亨錫)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면 광명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1936.11.) · 「빗자루」(1936.12.) · 「오줌싸개지도」(1937.1.) · 「무얼 먹구사나」(1937.3.) · 「거짓부리」(1937.10.) 등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껍질」 · 「버선본」 · 「햇빛 · 바람」 등이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 「자화상」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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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여성상
항일독립운동여성상 건립은 서울 정동 배재어린이공원에서 첫 발걸음을 디딘 이후, 같은 해 12월 충청남도 홍성군 홍예공원에 건립되었으며, 배화여자고등학교에 세 번째로 세워졌다.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 항일독립운동여성상 ‘혁명전야’는 100년 전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이 교복을 입은 오늘의 여성에게 등불을 밝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특히 배화여고에 건립된 항일독립운동여성상에는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배화여고 출신 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배화여고에 설치된 항일독립운동여성상은 1920년 3월 1일에 일어난 ‘배화여고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됐다. 배화여고 만세운동은 3·1운동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새벽, 배화여고 소속 두 학생이 빨래를 너는 척 하며 학교 뒷산에 올랐고 순식간에 40여명의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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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서거지 표지석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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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추모비
김규식(1881 - 1950)은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 종교인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주1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갔다. 더욱이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주2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의 딸 은수(恩受)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나, 차남 진동(鎭東)만 남았다. 1917년에 첫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김순애(金淳愛)와 재혼하여 장녀 우애(尤愛)을 얻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헌당식을 보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경기 · 충청장로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과 몽골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올란바토르 지점장을 지냈다. 정치적 활동으로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의 해외활동을 들 수 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 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의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 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 해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3월 15일 김일성 · 김두봉의 회신에 따라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월 21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성과 없이 돌아온 이들은 5월 14일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그 이전의 5 · 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 · 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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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집
베델(1872~1909)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글과 사진을 보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언론을 통한 그의 반일적 행동은 일제의 미움을 샀고 통감부는 주한 영국영사관에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베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사관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있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일제는 베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