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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호 묘
박장호(1850~1922)는 1905년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1906년 홍천에서 거의하여 관동의병의 영도자로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에는 운강 이강년(雲岡李康秊)과 함께 연합하여 계속 일군과 대전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되어 국내에서의 항쟁이 불가능해지자 계속적인 투쟁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 국내로부터 도만해오는 청년들이 수십만에 이르자 동년 4월 15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의병영수·유림수뇌·보약사(保約社)대표·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대표 등 560여명이 유하현 삼원보 서구대화사(柳河縣三源堡西溝大花斜)에 회집하여 종래의 개별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단일체로 통합하여 체계화한 항전을 전개하고자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의 최고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에 추대, 부총재 온당 백삼규(溫堂白三奎),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의 간부를 임명하고 결사복국(決死復國)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를 위해서 각현에 지단(支團)·분단(分團)을 설치하고 보민회·강립단 등 친일단체의 숙청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년호문제로 기원 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金平植) 등과 같이 기원독립단 즉 구왕조(舊王朝)에 충성하는 복벽운동(復酸運動)에 주력하는 수구파(守舊派)에 속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임시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어 1921년 5월에는 군사활동을 단일화시키기 위한 광복군총영을 설립하게 되니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던 그는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하여 이역땅에서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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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 묘
한규설(1848~1930)은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서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당하게 되면서 본직에서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어 이듬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가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를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하고 본관(本官)을 면직시켰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강제로 국권 피탈 후에 남작의 작위가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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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경 묘
성우경(1842~1916)은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친 시흥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시흥농민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시흥군 관리들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반란이었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은 1898년(고종 35) 음력 7월 9일 시흥 읍내[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발하여 관속배가사 9호가 파괴되고, 집물 등이 파손되었다. 1904년 9월 14일 일어난 제2차 농민 봉기는 개항 이후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철도 부설을 위해 노역자들을 강제 모집하는 데서 항쟁이 발생되었다. 성우경은 농민측 협상 대표로 선정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더욱 심각해진 부역 모집에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공서 등을 공격하였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 결과 성우경과 아전배 3인이 구속되었고, 시흥 한천변[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벌어진 제2차 항거에서는 수천 명이 운집한 결과 일본인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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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표 묘
당인표는 1919년 3월 22·28·29일에 걸쳐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이미 군하리에서는 장날인 3월 22일에 3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 참여했던 조강리(祖江里)의 최우석(崔禹錫)이 조남윤(趙南潤)·당인표(唐寅杓) 등은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3월 28일 당인표의 집에 모여, 이튿날 오전 11시에 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있으니 참여하라는 권유문 7매를 만들었다. 29일 오전 11시경 마을주민 40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조남윤과 당인표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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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문(홍병준) 묘
홍덕문은 휘는 병준(秉俊)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음력 2월 25일(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출옥한 후에는 일본 헌병이 가한 형독으로 인하여 수년 후 향리인 걸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두천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6일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 일대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중순경 정원이(鄭元伊)가 서울과 연락을 맡고, 청년지도자인 한원택(韓元澤)과 박창배(朴彰培)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태극기 등을 준비하였으며, 거사일을 동두천장날인 3월 26일로 잡았다. 1919년 3월 26일 송내·지행·좌기골·기촌·빈양말·하봉암·상봉암·창말·싸리말·안흥리 등 10여 마을 주민 1,300여 명이 일시에 시장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일찍이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고 만세대장으로 불리던 홍덕문이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만세를 복창하면서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들은 이담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신공우(申公雨)에게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고, 동두천역으로 진출하여 정차된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주내면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들이 칼을 빼들고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박경필(朴慶弼)·고복돌(高福乭)이 헌병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몽둥이로 쳐 쓰러뜨리자, 헌병들은 총개머리를 휘둘러 선두에 섰던 홍덕문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렇듯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시위 주동자 7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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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묘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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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호 묘
한백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각종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일대를 포괄한 지역에서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지회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우경화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배격하고 통일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4만 여명에 달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포괄하는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에 설립되었는데, 회원의 총수는 알 수 없다. 1927년 8월 24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남한산소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회장 한순회(韓順會), 부회장 석혜환(石惠煥), 총무간사 한철기(韓哲基), 유인목(兪仁穆), 허범(許範), 김상환(金尙煥), 한백호(韓百鎬) 등을 선출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지회장을 석혜환(石惠煥)으로 개선하였으며, 1929년 12월에는 조직 개편에 따라 유인목(兪仁穆)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말부터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하자 이 해 1월 신간회를 고수하고자 하는 회원들이 광흥(廣興) 지회로 개편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고,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지회도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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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묘
고영근(출생, 사망 미정)은 개항기 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정부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개방운동을 전개한 관리 · 독립운동가이다.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여, 근대개화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무렵 독립협회에서 선거한 중추원의관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으며, 독립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독립협회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898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개최된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6조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권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1898년 12월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과 함께 시위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기습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 집에 피신하면서 만민공동회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대표 자격으로 독립협회 대표인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사후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어려운 처지에 있던 만민공동회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5월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다시 설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3년 12월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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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 묘
윤효정(1858~1939)은 일제강점기 독립협회 간부, 대한협회 총무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박영효(朴泳孝) · 우범선(禹範善) 등과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우리나라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죽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李準) ·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하였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에 장지연 · 오세창(吳世昌) · 권동진(權東鎭) · 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 · 『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규탄, 공격하였다. 1908년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성장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창신동에 숨어 살았다. 1919년 3 · 1운동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철원군으로 옮겼고,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로 이사하였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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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묘
김춘수는 개항기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명으로는 병수(柄洙)를 사용하였다. 1898년부터 의병활동에 투신한 김춘수는 1907년 소모대장 이범구(李範九) 및 의병 800명과 함께 경기도 가평·강원도 홍천·양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김춘수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 13도의 의병이 모여 조직한 13도창의군에도 가담하였다. 하지만 이후 춘천에서 체포되었고 탈출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후학을 전념하다가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로 돌아와 훈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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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응 묘
안종응(1845~1906)은 경기도 지평 사람이다. 1896년 강원도 원주에서 아들 안승우(安承禹)와 이춘영(李春永)이 일으킨 의병부대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사에 뛰어난 학자였던 안종응은 단발령 소식을 접하고 이미 무장항쟁에 뜻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아들 안승우가 일찍이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들 부자는 위정척사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그로 하여금 의병 거의의 뜻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안종응은 아들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의병 거의를 권고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안승우, 이춘영 등은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안종응은 이들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포군 김백선(金伯善)을 의병부대에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유인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자기 대신에 안종응을 의병대장으로 추천할 만큼, 안종응은 제천·충주 의진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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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묘
안기영(1884~1920)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의 중군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안승우(安承禹)의 아들이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안기영은 종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특히 안기영은 이강년 의병장이 1907년 재거의할 당시 자신의 집을 군사 소모의 거점으로 제공하는 등 처음부터의진을 지원하였다. 또한 1895년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柳麟錫)의진의 활동상을 기록한 창의록인 『하사 안공을미창의사실』을 보존하여 후세에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