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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조형물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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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집
방정환(1899 - 1931)은 일제강점기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신. 아버지는 방경수(方慶洙)이다.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 ·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을 대행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다. 1928년에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방정환이 남긴 작품은 번안물이 대부분이다. 원문의 뜻과 흐름을 손상시키지 않고 외국어의 장벽을 무난히 돌파하여 동화 번안작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번안 내지 개작한 동화들이 지닌 일관된 특징은 풍자와 해학의 정신과 교훈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래의 유교도덕에 얽매어 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감성 해방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들을 웃기기보다는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웬일인지 별 하나/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눈물 흘린다.”(형제별)와 같은 동요에서 이러한 모습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실천하고 남긴 업적을 간추려보면, 첫째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의 조직과 3 · 1독립운동 참가, ‘천도교소년회’ 결성 및 육성이나,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늙은이’ ·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일 및 아동문제연구단체인 ‘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 제정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둘째로 번안 및 개작작가 · 동화작가 · 동화구연가 · 아동잡지 편집인으로서의 업적이다.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고 『어린이』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 · 이원수(李元壽) ·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셋째로 아동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감상적 · 관념적 · 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현실적 ·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금세기 우리나라의 지사(志士)요, 선구적 언론인이요, 교육자요, 문학가로 불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 ·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 8종이 있다. 1983년 5월 5일에는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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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동상
김상옥(1889 - 1923)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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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공훈 흥사단 단우 175명 명단 안내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였다.또한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를 결성하여 국내에서 일제치하의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1925)로 통합되었고, 그 뒤 동우회로 개칭하였다가 이른바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 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에 국내위원부를 조직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였다. 1969년 8월 19일에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1981년 6월 민족대학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3월 도산사상연구회, 1989년 6월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창립하였다. 1991년 2월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부정 선거 감시활동을 벌였다. 1992년 5월에 청소년연구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3월에 민족통일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 1998년 11월에 도산안창호 기념관 건립 및 개관(사단법인 도산기념사업회)하였으며, 2007년부터 독립유공자후손돕기운동본부를 창립하였다.2007년 5월에 미주위원부 산하 시카고지부를 창립하였고, 2008년 3월에는 평택지부에 도산안창호교육관을 개소하였다. 2008년 10월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의식,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청년인재를 양성하고자 미래사회리더스쿨을 운영하여 2010년 현재 6개 지부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3월 대전에 만인산 푸른학습원을 개원하였고, 광주시에 청소년문화의 집을 개관하였다. 2009년 4월 흥사단 미주위원부 산하 토론토지부를 창립하였고, 6월에는 서울시 중부교육청으로부터 평생교육시설 신고증을 교부받아 평생교육 분야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흥사단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德)·체(體)·지(智) 삼육(三育)을 기본덕목으로 하는 인격·단결·공민의 3대 훈련을 실시한다. 단우(團友)는 자아혁신·신성단결(神聖團結)·단무봉사·책임완수·대공복무(大公服務)를 5대 생활지표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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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중앙학림)
중앙학림은 1906년에 불교계의 근대화를 지향하였던 불교연구회가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처음 개교하였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14년 불교고등강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15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회의원 정기총회에서 불교고등강숙의 명칭을 중앙학림으로 개칭하고, 11월 5일 당시 숭일동[지금의 명륜동 북묘(北廟)]로 이전, 개교하였다. 학생은 전국 30본사를 9등급으로 나누어 등지별로 인원수를 제한하였고, 정원은 120명이었다.1922년 중앙학림은 불교계의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용운의 지도로 중앙학림 학생들은 불교계의 만세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앙학림은 총독부로부터 전문학교 승격이 거부되고,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5년간 휴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중앙불교전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40년 혜화(惠化)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동국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니 현재의 동국대학교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서 운영하였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런 까닭에 1919년 불교계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수많은 항일 승려를 배출하였다. 중앙학림의 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이후로도 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불교계의 걸출한 지도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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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동상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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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집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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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독립만세운동 선창터 표지석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6.10 독립만세운동 선창터는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국장행렬이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中央高普生) 이선호(李先鎬)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先唱)하였던 자리이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6일 죽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에 대한 전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은 대체로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지폐위조사건(中國紙幣僞造事件)과 개벽지압수사건(開闢誌押收事件)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계열은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거사계획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쏠리는 틈을 타 이뤄졌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시대일보(時代日報)』 배달부 김낙환(金洛煥)을 통해 빌린 인쇄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하숙집에서 1만 여매를 인쇄한 뒤, 이선호·박두종·이천진·박하균·유면희(柳冕熙) 등이 각각 자기학교 학생 및 관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셋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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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집(대각사)
백용성(1864-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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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집
현진건(1900-1943)의 호는 빙허이며, 일제강점기 「빈처」, 「운수 좋은 날」, 「고향」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현진건은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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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집
김경천(1888-1942)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수청지역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적토벌에 성공한 후 그는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군정(軍政)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은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21년 초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그는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는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의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그는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으로 이동한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그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그는 뽀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그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秋風)이었는데,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그가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그는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실망한 그는 1923년 4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리스크에 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은 그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소련정부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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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운정 표지석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 민태호閔台鎬(1834~1884)가 지은 정자이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이곳에 유폐되어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합장소로도 이용되었다.1919년 4월 강택진은 외교·언론·선전을 통한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현정근(玄貞根)을 만나 운동자금 200원을 제공해 주었다. 1920년 10월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를 맡아 경상북도에서 애국금 3,0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