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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묘
이봉창(1900 -1932)는 일제강점기 일왕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서울 출신이다. 이명은 기노시타(木下昌藏)이다. 1921년경 한 ·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 · 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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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사
의열사는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동녕·김구·조성환·차리석·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7위 선열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 추모 제전을 지낸 이래 계속 있었으며, 2011년부터는 전통 제례 방식을 따라 임시 정부 수립일(4월 11일)이나 환국일(11월 23일) 즈음에 '효창원 7위 선열 의열사 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동안 의열사를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애국 애족의 정신을 기르도록 2016년 5월부터 상시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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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묘
조성환(1875 - 1948)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부의 부패를 바로잡으려 시도하다가 발각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서 장교로 임관했다가 사직했다. 1906년에는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고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 특사 파견 때 이상설을 도왔다. 1912년에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했으나 발각되어 체포된 후 거제도에 1년간 투옥된 바 있다. 1919년에는 김좌진 등과 함께 군정부를 조직하고 북로군정서로 개편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중국 북경과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다가 1936년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취임해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한 후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1948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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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석 묘
차이석(1881 - 1945)은 독립신문사 기자,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이명은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岩)이고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안창호(安昌浩) 등과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며 인재 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 · 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었으며, 1930년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의 독립지사들을 한데 묶기 위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그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홍보선전책자로 「한보(韓報)」 · 「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 의욕을 드높이는 데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 의열단(義烈團) ·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 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했던 김원봉(金元鳳) ·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폐쇄를 강력히 주장,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 · 조소앙(趙素昻) · 최동오(崔東旿) · 양기탁(梁起鐸) · 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 · 이시영(李始榮) · 조완구(趙琬九) · 김붕준(金朋濬) · 양묵(楊墨) · 이동녕(李東寧) · 안공근(安恭根) · 엄항섭(嚴恒燮)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어 주석에 이동녕이 선출되었을 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었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충칭[重慶]에서 사망하였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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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묘
이동녕(1869 - 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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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집
이봉창(1900 -1932)는 일제강점기 일왕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서울 출신이다. 이명은 기노시타(木下昌藏)이다. 1921년경 한 ·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 · 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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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기념관
이봉창(1900 -1932)는 일제강점기 일왕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서울 출신이다. 이명은 기노시타(木下昌藏)이다. 1921년경 한 ·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 · 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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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항거 터
김상옥(1876 - 미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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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비(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 출신 순교자 9명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벌여 일제의 잔혹한 핍박에 저항하였다. 그 중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는 옥고투쟁으로 순교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위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순교신앙' 정신을 나누고자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산정현교회내에 본 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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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 기념비
윤기섭(1887 - 1959)은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교사 ·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경기도 장단 출신으로, 호는 완운(蜿雲), 이명은 윤중규(尹仲珪)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재직했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사 · 교장으로 10여 년간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에 가입하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1920년 육군무관학교 교관, 상해거류민단 위원 등을 지냈고,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함께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1923년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했고, 1924년 2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6∼1932년 임시정부 국무원(군무장), 1927년 개헌안 기초위원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1924년 군사교육서인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저술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1929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한국혁명당, 1930년 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계열 인사들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2년 10월 12일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운동단체 통합을 추진해 각단체연합주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0월 23일 열린 회의에서 연합체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결의하였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어 1936년 민족혁명당 당보부책임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차장을 지내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법무 · 군사 · 교육부문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해방이 되자 1946년 2월 귀국하여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이 되었고, 같은 달 좌익세력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지냈고, 1948년 국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1956년 7월 안재홍(安在鴻)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반혁명분자혐의로 구속되어 숙청되었다.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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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 태극기비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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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발견지 칠성각
칠성각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 보수작업 도중, 오래된 태극기와 더불어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6월에서 12월까지 발행된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십 수점의 항일신문들이 발견되었다. 이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독립단체에서 사용한 태극기로 보이며,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 양식과 동일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넣은 유일한 태극기로 항일정신이 담겼다. 때문에 이 태극기는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초월 스님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