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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본적지
김익상(1895-1942)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귀향하였으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없었고, 암살당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었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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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마포전차종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 이후 서울 시내 각처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해질 무렵부터 교외로 번져나갔다. 오후 8시경에는 약 1천명의 군중이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날 시위는 밤 11시경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백 명이, 밤 12시 20분경 약 4백 명의 군중이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등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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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기념비
어윤희(1880-1961)는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여성들에 의한 3, 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전도사로 외딴섬의 전도와 독립정신계몽을 자원하였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수백장이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전달되었으나 그가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자, 어윤희가 보따리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것을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申觀彬), 장님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 등이 합류하였다. 그 결과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은 여성들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만세시위 주모자로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만세를 불렀다. 출감한 뒤에도 독립운동자들에게 비밀리에 여비를 마련하여주었으며, 육혈포탄환 등을 감추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하여 고아사업을 하였으며,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10년간 시무하였으며,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그 뒤 서울 마포에 서강유린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1995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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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묘,추모비
베델(1872~1909)S는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독립운동을 펼친 영국인 독립운동가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종의 밀서를 보도하는 등 일본의 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했다. 베델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영국에 추방을 요구했다. 추방 소송 중 건강이 악화한 베델 선생은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로 순국,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베델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50)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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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묘
헐버트(Hulbert, Homer B)(1863-1949)1863년 1월 26일 미국에서 태어났다. 1886년 내한하여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11월, 고종(高宗)의 비밀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행정부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보호조약 저지를 호소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의 비밀 특사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초 헤이그에서 이상준과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돕고 그달 10일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헤이그를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는데, 그해 8월에 고종이 퇴위하자 호머 헐버트는 일본의 저지로 미국에 남게 되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38년 동안 미국에서 기고와 강연, 회견 등을 열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한국 독립 호소문[What About Korea]’을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1942년에는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한국인들의 단결과 대일 투쟁을 호소하였다. 1947년 7월에는 미국 신문 『스프링필드 유니언(Springfield Union)』과의 회견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주장하였고, 한국의 3.1운동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설파하였다.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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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기념관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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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창립지 표지석
1908년 8월 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말,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가 개화의 요람기에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게 됨으로써 배달말글몯음(1911)→한글모(1913)→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한글학회(1949)의 터전이 되었다. 봉원사는 우리 말,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세운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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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
윤동주(1917-1945)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柳玲),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張德順), 고향 후배 문익환(文益煥),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김형석(金亨錫)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면 광명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1936.11.) · 「빗자루」(1936.12.) · 「오줌싸개지도」(1937.1.) · 「무얼 먹구사나」(1937.3.) · 「거짓부리」(1937.10.) 등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껍질」 · 「버선본」 · 「햇빛 · 바람」 등이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 「자화상」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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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동상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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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기념탑(서대문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서울 중심지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로부터 시작된 전 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 발발의 또하나의 중심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고귀한 순국의 현장이었던 서대문 감옥 가까운 곳인 서대문 독립공원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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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동상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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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열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좌측에는 항일의병무장상, 윤봉길. 이봉창열사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열사 만세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바로 아래의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에는 일제의 침챡부터 조국독립을 재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투쟁사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