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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묘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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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3.1운동시발지 표지석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는 민족 광복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인 3.1운동이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수암면과 군자면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맞서 지역민을 조직하여 하부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수암면의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과 군자면의 강은식, 김천복, 권희, 장수산 등의 마을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형을 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공을 기려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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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 의거 기념비
안광덕(안광득 1897-1933)은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梅谷面 玉田里)에 거주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간 매곡면은 각 촌락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옥전리·노천리(老川里)에서는 밤을 이용하여 주민 100여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4일 오전 11시경에는 시위군중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천리 면사무소에 쇄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시위군중과 함께 추풍령(秋風嶺)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형을 언도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위소되고 징역 1년 2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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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의 묘
안광덕(안광득 1897-1933)은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梅谷面 玉田里)에 거주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간 매곡면은 각 촌락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옥전리·노천리(老川里)에서는 밤을 이용하여 주민 100여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4일 오전 11시경에는 시위군중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천리 면사무소에 쇄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시위군중과 함께 추풍령(秋風嶺)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형을 언도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위소되고 징역 1년 2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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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안 상
윤기안(1899 - 1990)은 평안북도 박천(博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율리면 무진리(大同郡栗里面茂辰里)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이곳의 기독교(基督敎) 학교의 교사로서, 이날 동료교사·학생·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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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흉상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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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집
정인보(1893~1950)는 서울의 동래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한학자이다. 당대 양명학의 대가 중 한명인 이건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한일합당 직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학과 역사학을 가르쳤으며,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신민족주의 역사가의 대표민물로서 우리 민족의 고전을 널리 알리는 데에 노력했으며, 1930년대에는 조선학운동을 일으키면서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동리에 은거했다. 1947년 국학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자 사임하고 국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6.25전쟁 때에 북한국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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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기념관
함석헌(1901 - 1989)은 해방 이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을 저술한 작가. 문필가, 민중운동가이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인간혁명≫(1961)·≪역사와 민족≫(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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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묘
김법린(1899 - 1964)은 해방 이후 제3대 민의원, 원자력원장,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이다. 14세에 출가하여 1915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 · 1운동 때 영남의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6년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백성욱(白性郁) · 김상호(金尙昊)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한용운(韓龍雲)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1930년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를 연구하였으며, 1931년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多率寺) · 해인사(海印寺) · 범어사 등의 사찰을 다니면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8년 만당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불교계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겨울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때에는 미군정장관 하지를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협의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불교혁신운동을 벌였으며, 동국학원(東國學院)의 이사장직을 맡아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52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피선되는 등 정치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고,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세속을 떠났던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독립운동과 정치활동, 교육계의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불교계의 정화와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던 행정가 · 학자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정교분립(政敎分立)에 대하여」 · 「3 · 1운동과 불교」 · 「12인연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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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묘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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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집
송진우(1887 - 1945)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1916년에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감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김성수 · 현상윤(玄相允) · 최린(崔麟)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고 양교계의 행동통일이 이룩되어 3 · 1운동으로 결실되었다. 3 · 1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적용법조문 관계로 무죄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으나 사실상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 · 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벌인 데 이어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제창, 추진하였으며, 1923년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순회하여 위문금품의 모집운동을 개시하였다.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 이해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에 취임하고 다음해에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5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한 뒤,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설을 12회에 걸쳐 집필, 연재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낸 3 · 1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정인보(鄭寅普)와 유칙(遺勅)주1의 작성을 획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다음해 2월 일본의 새로운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특사로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김성수의 뒤를 이어 다시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제3회 범태평양회의가 일본 경도(京都)에서 개최되어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기념축사 관계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 해 9월에 속간하였다. 1931년 4월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모금으로 아산 현충사를 중수하였다. 1931년부터 4년간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위하여 하기 방학에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이 사건이 일본의 한중이간책(韓中離間策)임을 사설로 논파하여 한중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며, 또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사업을 전개하여 뒷날 장개석(蔣介石) 국민정부주석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았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6년간의 준비 끝에 마련한 새 철자법에 의한 활자를 사용하는 등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힘썼다. 1934년 『동아일보』의 사설로써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 지지하여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 1936년 8월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다음해 6월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고문에 취임하였으나, 1939년 12월 총독부로부터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귀국 도중 피검, 구속되어 다시 폐간을 강요받아 같은 해 8월에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며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드러누웠다. 1943년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가 해체되고, 동본사(東本社)가 설립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元世勳), 장덕수(張德秀), 서상일(徐相日)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월 1일 『동김병로 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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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3사자 동상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탄압을 피해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로 피난하였다. 가인 김병로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고하 송진우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 위당 정인보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733-4번지에 거주하였다. 사람들은 도봉구에 은둔한 세 위인을 일컬어 '창동3사자'라 칭하였다. 도봉구는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창동 3사자의 재조명 및 구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창동 3사자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2016년부터 추진하여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