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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 참여의 기폭제가 됐던 대구 남일동 7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애국계몽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2월 21일 북후정에서 열린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는데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눈부셨다. 여학생은 물론 가정의 부인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성 못지않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남일동 7부인회는 비녀와 반지를 뽑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석을 국채보상금으로 헌납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정신은 뒷날 3. 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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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모 집
신재모(1885 - 195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24년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폭력단·용진단(勇進團)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비밀결사인 파괴단을 조직하여 상해로부터 폭탄을 가져와서 대구내의 일본인 상업중심가를 파괴하고 일본인 수뇌들을 폭살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는 일본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노동친목계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진우동맹(眞友同盟)을 조직,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진우동맹이 일본경찰에 탐지되면서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잡혀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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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형무소 이원록 조형물
대구형무소의 개소 당시 수감 인원은 형사 피고인 85명에 수형자 89명을 합쳐 모두 174명이었다. 1909년에는 607명, 1910년에는 759명으로 급증하였는데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이후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반증이었다. 3·1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5,0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는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항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1,200여 명에서 1,400여 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대구형무소에는 독립투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는데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수인 번호 ‘264’도 대구형무소 복역 시절의 번호이다. 시인 김영랑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장진홍과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 등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39년 1월 1일 기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의 본적을 보면 전체 수형자 1,147명의 본적은 한국·중국·일본에 걸쳐 있고, 국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도 경상북도가 가장 많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보다 27명이 많을 만큼 대구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투옥된 형무소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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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사 기념비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대구에서 대한 자강회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자생 계몽 운동 단체로서 흥학 설교(興學設校)와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교육 진흥을 바탕으로 한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하였다. 대구 광문사에는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층 등 지역의 공망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 광문사의 사장에는 김광제(金光濟), 부사장에는 서상돈(徐相墩)이 맡았다. 1906년 4월에 개최한 총회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관한 방침을 의결하였다. 이를 위해 대구 광문사 내에 문회를 설치하고, 그 회원으로 400~500명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3월 새로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와 연대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신태휴는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황제의 칙유(勅諭)와 천 원의 하사금을 매개로 하여 달성군수 김한정과 함께 관덕정(觀德亭)을 수리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 설립에 나섰다. 여기에 대구 광문사 사원 다수가 발기인이 되어 기금 조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또한 신태휴는 탁지부의 훈령대로 측량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찰부 소재 낙육재와 연계재 소속 전토를 합해 달명의숙(達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에 이현주(李玄澍), 부교장 겸 강사에 김광제 등이 맡게 하였다. 그밖에 낙육재에 공립 대구 중학교, 대구 사립 양성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관내 41개 군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설치되어, 학생 수가 무려 4,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대구군의 학생 수는 470여 명에 달했다. 1907년 2월에 대구 광문사 문회는 학교 설립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구 광문회로 바꾸고,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대한 황제의 조칙을 낭독 선포한 후 회원들이 각 군을 순행하여, 학교 설립 방침과 사회적 취지를 연설하고,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강구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 문회는 일본동아 동문회(東亞同文會),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 국제적으로 연계하여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육 진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대한 자강회에서 정부에 의무 교육 실시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이어서 강제적 의무, 곧 의무 교육제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다시 정부에 건의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는 출판 활동에도 역점을 두었다. 곧 동서양 서적의 번역 출판과 충효열행(忠孝烈行)에 관한 사례집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 군 관리의 잘잘못과 인민의 선악을 조사하여 매월 3회씩 잡지로 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구 광문사는 출판 사업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해 동사 내에 찬술원을 두었다. 1906년 5월 대구 지방에는 계몽 운동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던 자치 조직으로서 인민 대의소(人民代議所)가 조직되었다. 인민 대의소는 민지 개발(民智開發), 민권 부식(民權扶植), 설교 흥학(設敎興學), 식산흥업 등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면서,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인민의 회의체였고, 자치 및 자강을 도모하여 국권을 확립하고자 한 단체였다.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 문회는 문회를 대동 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단연 보상 운동(斷煙報償運動)이 제기되어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자생적 계몽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 대구 광문사는 교육 운동, 문화 운동, 경제적 실력 운동 등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계몽 운동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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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대구 지역의 부자인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개인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다. 우현서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신문화(新文化), 신교육(新敎育) 보급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한말 대구 애국 계몽 운동의 산실이자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는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義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교육 기관으로 세워진 우현서루 도서관에는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과 청나라에서 수입한 신학문 관련 서책 수백 종 등 약 10,000권 정도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다. 1904년 이동진이 창설하였으며, 매년 20~30명의 젊은 학생을 선발하여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시켜 약 150여 명의 애국지사를 길러 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1859~1925],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 사건’의 주인공 김지섭(金祉燮)[1884~1928], 이동진의 손자이자 이일우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이상백(李相佰)[1904~1966]·이상화 등을 비롯하여 권일제, 여운향, 김성수 등이 우현서루 출신이다. 또한 1906년 8월경 이일우, 최대림(崔大林), 윤영섭(尹瑛燮), 김선구(金善久), 윤필오(尹弼五), 이종면(李宗勉), 이쾌영(李快榮), 김봉업(金鳳業)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의 사무실이 우현서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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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단연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는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 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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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묘
김정철(1900-1966)은 충청남도 대전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김창규의 집을 방문하여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대전에서도 장날인 이달 27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등 300여 매를 김창규에게 미리 주었다. 3월 27일 오후 3시경, 김정철은 대전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을 나누어주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시가를 누비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7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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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집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建祠之命)으로 건립된 문충사(文忠祠)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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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송병순 사당(문충사)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순(1839-1912)은 충청북도 영동 사람으로,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송병순은 일제침략과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 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 은혜롭게 베풀어 준 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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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산 격전지비
이규홍(1877-1928)은 전라북도 익산 사람으로, 1905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4월 25일 친구 박이환, 문형모와 거의할 것을 맹약하고 이듬해 10월까지 거사준비를 하였다.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총기, 탄약, 화약, 의병 등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1월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1월 15일 고산 가금리에서 적과 첫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진안·장수·무주·용담 등지에서도 게릴라전을 벌여 왜적 44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적의 의병대 소탕전으로 인해 형세가 곤궁해져 1908년 4월에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이규홍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계속하는 등, 독립운동의 뜻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3월에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1924년 2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929년 6월에 형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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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인동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3.16인동장터 만세운동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3월 16일에 인동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16인동장터 만세운동은 대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인동시장의 가마니 더미 위에서 한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동조하여 시위대가 수백 명으로 불어나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 등이 시위대에게 잉크를 뿌려 잉크가 묻은 사람을 중심으로 무차별 총격과 체포에 나섰다. 결국, 전통 생업에 종사한 젊은 민초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평화적, 비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체포된 청년 중 대다수가 옥고를 치렀다. 이를 계기로, 3월 27일과 4월 1일까지 인동 지역 주민들에 의한 조직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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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섭 추모비
손양섭(1921-1945)은 충청남도 대전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말기 연합군 포로의 감시 요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에 한국인 포로 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사실상 모집이 아닌 강제 징집의 형식으로 포로 감시원 일을 맡게 되었다. 손양섭을 비롯한 3천여 명의 청년들은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군무원 등 1,400명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고, 손양섭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손양섭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와서 2년이 된 1944년 6월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손양섭을 비롯한 한인들을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패할 것을 전망한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한인 군무원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이억관)을 중심으로 중부 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4년 12월 29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려독립청년당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이 책임자가 되어 노병한, 민영학, 조규홍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지하 공작하던 손양섭을 포함하여 한인 6명이 말레이(싱가포르) 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대해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노병한, 민영학과 밤을 새워 사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마땅한 방안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1월 4일, 전출명령에 따라 손양섭 등 전출자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 민영학, 노병학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로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천 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 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암바라와의거에서 형무소장 사살에 성공한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겨서 위생 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활은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일본군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