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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갑 집 터
어수갑(魚秀甲)은 홍남표와 함께 강원도 문막에 있는 노림의숙교로 가서 후학양성의 길을 걷는 중 1919년 3월 22일 제 1회 졸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고종인산에 참석한 후 독립선언서를 졸업생 40명에게 배포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만세운동을 고양하였다. 1921년 10월 군자금 확보활동 및 1926년 만세운동 발각으로 2차례에 걸쳐 체포되었고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출소 후 1945년 김포군 하성면장을 역임하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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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신흥상회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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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기념관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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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박물관
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연 여주박물관은 여주의 역사와 민속자료 등을 조사·수집·전시·교육하고, 새로운 학술자료를 발굴하며 여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주박물관 2층 여주역사실에서는 우리나라 근, 현대에 여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역사와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 및 여주 3.1운동, 국권 회복을 위한 여주인들의 투쟁 흔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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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수 집
정철수(1924~1989)는 1943년 12월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가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참여하였다. 1944년 9월 화북(華北)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수료하고, 1945년 1월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인민위문단(華北朝鮮人民慰問團) 대표로 태행구(太行區) 지역을 순회하면서 조선인민을 위로하였다. 정철수는 '조선인민은 해방구 군민들과 함께 작전(作戰)하여 철저히 일본파쇼를 소멸하고 중한(中韓)인민의 해방을 위해 분투할 것을 희망'한다고 역설하였다. 해방 이후 길림시(吉林市)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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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한 집
차병한(1885~1933)은 1919년 4월 3일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爀)·장제덕(張濟悳)·장소진(張韶鎭)·이영쇠(李永釗) 등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당시 그는 장안면 석포리(石浦里) 이장으로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며 고향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날 차병혁 등과 조암(朝岩)장터에 모인 2천 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 때 그는 차병혁과 함께 면장 김현묵(金賢默)을 만나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김현묵을 선두에 세워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花.樹里)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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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 송병선, 송병순 사당(성암사)
성암사는 한말의 우국지사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주환(1854~1919)은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이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송병순(1839~1912)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충절을 기리어 이주환에게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 송병선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송병순에게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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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독립만세운동, 이태준 조형물
본 조형물은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과 함안 출신 이태준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군북 장날을 기해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장꾼과 주민 등 5000명이 넘는 군중이 가세해 일제에 항거한 만세의거로 거센 항거에 놀란 일제가 대포·포대 병력까지 동원해 진압에 급급했던 함안의 자랑스런 만세의거다. 3·1만세운동 기간 중 사망·부상자가 50여 명에 이르러 전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희생을 치렀고, 일본군경과 민간인 사상자 수가 전국에서 최고일 정도로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을 압도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태준(1883~1921)은 경남 함안(咸安) 출신으로,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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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순국사적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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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유적지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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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태지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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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수 집
한재수(1912~미상)는 경북 성주 출신으로, 이명은 한지성이다. 그는 1931년 대구상고를 졸업한 뒤, 바로 양친에게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국민당의 인재양성 학교인 중앙정치학교에서 4년 수학하고, 1938년에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해산하고 만든 조선의용대에 합류해 정치조 선전주임과 외교주임 등을 지냈다. 1942년에는 김원봉 등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됐다. 1943년 8월부터는 2년간 한국광복군에서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와 미얀마 대일 전선에 파견한 인면전구공작대(대원 9명) 대장으로 활약했다.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포로심문·문건번역 등과 같은 작전을 펼친 이 공작대는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대일 군사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