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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로 묘
이봉로(1902-1940)는 1924년 4월 중국 북경(北京)의 서성 공업 대학에 유학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한 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남 유림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기지 마련 자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영주 출신 송영호(宋永祜), 봉화 해저리 출신 김화식(金華植) 등과 함께 김창숙의 뜻에 찬성하며 유림의 독립운동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장기적 독립 투쟁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먼저 중국에서 활동중인 동지와 조선인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 순차적으로 무장 실력을 양성하고 군인을 길러낼 것, 조선으로 진입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제출한 영호남의 유림 130명을 대상으로 20만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봉로는 해외 연락책을 맡아 중국 상해로 가서 정원(鄭遠)[정세호(鄭世鎬)]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김창숙에게 전달하거나 김창숙, 송영호, 김화식 등 세 사람이 입국한 뒤 북경에서 북경 주변 정세를 탐문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림의 독립운동 전개 중 중국 북경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27년 3월 대구 지방 법원의 재판에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봉로는 이 재판에서 재판장의 "조선 ○○(독립)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물론, 찬성"이라고 대답하여 재판장을 놀라게 하였다. 1927년 7월 이봉로는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증거가 충분하다며 공소를 기각하였다. 같은 달 10일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민족 협동 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 대구 지회에 가입하여, 1930년에 동회 교육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에서 이화(李華) 여관을 운영하였다. 여기에 대구의 독립운동가 이상훈을 비롯한 신재운, 김찬기 등이 자주 찾았다. 1940년 2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이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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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용 묘
김세용(1907-1966)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정보수집과 초모공작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4월 중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였으며, 그 뒤 광복군으로 귀속되었다. 그 뒤,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총대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第四團特科總大員隊韓靑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적 점령지구에 침투하여 한·중 양국 민중들의 항일의식을 환기시키고, 지하조직을 통해 정보수집 및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194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한미합작의 특수훈련(OSS)을 받은 뒤 국내진공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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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묘
김세영(1889-1979)의 호는 추암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당시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기독교 조사(助事)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세영은 3월 상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 영덕으로 돌아왔다. 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리 교회에서 권태원(權泰源)에게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 채택과 서울·평양·대구 등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후, 병곡면 송천리 정규하(丁奎河)와 협의하여 영덕읍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하였다. 김세영의 제안에 권태원이 3월 15일 정규하와 협의하였는데, 정규하는 "3월 18일 영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정규하의 제안에 권태원이 동의하자, 정규하는 바로 지역 양반들의 참가 권유를 부탁하였으며, 3월 16일에는 병곡면 송천리 예배당에서 90여 명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또 3월 17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3월 18일 영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3월 18일 오후 1시경 정규하·남계병(南啓炳)·남효직(南孝直) 등과 군중들은 영해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영해면에 있는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학교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어서 정규하는 오후 2시경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주재소·면사무소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세영은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검사국과 대구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세영은 1920년대 영덕기독교청년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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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낙현 묘
박낙현(1887-1957)은 1919년 3월 의성읍 장날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낙현은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대구 성경 학당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갔다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과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박낙현은 3월 12일과 13일 교회의 집사 윤용구(尹龍九)와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만세 시위의 구체적인 실행 방도를 모의하였다.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제의하여 찬성을 얻고, 윤용구·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라고 쓴 작은 기(旗) 수십 개를 만들었다. 이들은 같은 교회의 김군석(金郡石)·김자룡(金子龍)·신진수(申震洙) 등과 의성읍 도동 교회[현 의성읍 교회]의 김천특(金千特), 안평면 석탑 교회의 최경원(崔慶源)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았다. 그리고 의성 공립 보통학교 출신인 윤영주는 만세 시위에 학생들을 동원시키기로 하고, 후배 정의진(鄭義鎭)·김덕암(金德岩)·구남술(具南述) 등과 모의하여 학교 인근 도동동(道東洞) 공자묘 뒷산에 모이게 한 후, 시장 쪽으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일본 경찰은 조문면·의성면·안평면 등지의 예수교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 운동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3월 1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오후 1시경 의성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도동동(道東洞) 공자묘 뒷산으로 모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시장을 폐쇄시키고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공자묘 뒷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장에서 용의자 15명을 예비 검속하고, 나아가 1시 30분경 시장을 폐쇄해 버렸다. 박낙현은 오후 2시경 윤용구·윤영주·오상룡 등 주동 인물들과 함께 두루마기 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흩어지고, 박낙현관련항목 보기은 윤영주를 포함한 9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낙현은 1919년 4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고, 4월 2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5월 22일 고등 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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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 묘
최태만(1918-199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최태만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에 참가하여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최태만은 헌병대원으로 편제되었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최태만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태만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14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최태만은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최태만은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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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해 묘
김용해(1897-1919)는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918년 3월 8일 오후가 되자 서문시장 주변에 만세운동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7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날 김용해도 아버지 김태련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서서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김용해는 일본 군경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던 아버지 김태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집단 폭행을 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김용해는 3월 28일 석방되었으나 다음 날인 3월 29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용해의 공적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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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련 묘
김태련(1879-1943)의 이명은 김주현이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태련은 개신교 신자로서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남산교회 조사(助事)를 맡고 있었다. 1919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으로부터 대구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는 제의를 받고 이만집의 제의에 동조하였다. 이후 김태련은 이만집·정재순을 비롯하여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하며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경 서문시장에 7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자 먼저 이만집이 만세 시위에 대한 연설을 하였고,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대구 성경학교·남산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서서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날 시위에 함께 참여한 아들 김용해는 일본 군경에서 심한 폭행을 당하여 3월 29일에 순국하였다. 김태련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태련은 1943년 8월 19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김태련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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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호 묘
강명호(1924-1992)의 호는 민수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 말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4월 한국인 청년들과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重慶]으로 가서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요원으로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는 광복군 대원들의 군량 수급, 신입 대원의 교육 훈련, 연합군의 인원 요청 시 파견할 인원 파악 등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초모(招募) 작전과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군 점령 지역에 대원을 파견하는 임무와 연합군과의 합작 공작 임무 등도 수행하였다. 1946년 5월에 광복군 본진과 함께 귀국했으며, 1992년 5월 15일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 공훈을 기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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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 묘
김홍준(1922-199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김홍준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 때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김홍준은 제3소대장 최외문(崔外文) 휘하의 제3소대원으로 편제되어 활약하였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김홍준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으나,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홍준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김경룡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김홍준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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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희 묘
김두희(1921-2000)의 이명은 김길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京都]의 리츠메이칸[立命館]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39년에는 학비 마련을 위해 소네자키[曾根]타일주식회사의 직공으로 일하였다. 직공으로 일하면서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 대우를 체험하고, 같은 직공으로 일하던 이수영(李秀濚), 양달성(梁達成), 신임휴(申任休)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인 민족부흥회(民族復興會)를 결성하였다. 회원들은 민족부흥회의 목적을 조선 독립으로 정하고, 개별 연구 및 상호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과 함께 동포에 대한 차별 철폐 활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민족부흥회는 일제 경찰의 취체(取締)를 피하기 위해 표면상 평화회(平和會)라 명명하고,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개선과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1940년 6월 중순까지 수십 차례의 회합을 가졌고, 소네자키타일주식회사 공장 등지에서 일본인으로부터 모별과 압제를 당하고 있는 조선인 직공들을 대상으로,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 상황 등을 알리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당시 김두희는 교토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벌였고, 1940년 3월 무렵에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7월 16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비밀 회합을 가지며 동지 규합 활동을 이어갔으나, 1940년 12월 28일 일제 경찰에게 비밀 결사 활동이 발각되며 다시 붙잡혔다. 이어 1941년 5월 5일 나고야[名古屋]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집행 유예 5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2000년 2월 29일 사망하였다.정부는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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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식 묘
최동식(1926-2005)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최동식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 때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최동식은 헌병대원으로 편제되었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최동식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동식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최동식은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최동식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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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만 묘
현영만(1921-1981)은 1940년 4월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입학하였다. 6월 동급생 조형길(趙亨吉)·김병욱(金炳旭)과 함께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밀약한 후 다른 동급생 이형수(李亨洙) 등 여러 명을 포섭해갔다. 12월 1일 현영만 등은 학교 근처 대봉정(大鳳町)에 있는 이형수의 하숙방에서 무우원(無憂園)을 결성하고 약칭 ‘M’이라 했다. ‘무우원’이란 말 그대로 근심·걱정 없는 낙원이란 뜻인데, 승려 출신으로 결사를 주도한 조형길[본명 조소영(趙宵影)]의 제안으로 지어진 불교 색채의 이름이다. 『백유경(百喩經)』 속 우화들의 가르침대로 대승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폭력투쟁을 지양하고, 조선어문학 연구를 통한 문화향상과 경제 부문의 실력양성으로 민족의식 고양과 독립 달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함에 목표를 두었다. 또한 일제가 내세우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기만성과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어내 폭로함과 아울러 지원병 모집, 공출·징용 등의 강박적 요구는 일절 거부하기로 당면 행동방침을 정하였다. 규약도 정하여 집행장 휘하에 총무·선전·경제·과학·종교·문예·후생의 7개부를 두기로 하였다. 집행장은 조형길이고 현영만이 총무부장을 맡았다. 현영만은 1941년 3월 말 대구사범학교를 수료하고 경산의 진량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함께 교사가 된 김병욱·이형수와 양산(梁山) 통도사의 스님 등 여러 명을 끌어들여 조직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 어느 조직원의 밀고로 회원 18명이 경찰에 붙잡혀갔고, 그 중 13명은 예심에서 풀려났으나 도쿄 지부장 최수원(崔壽源)이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하고 현영만 외 조형길·김병욱·강증룡 등 4명은 기소되었다. 1944년 6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현영만은 1977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