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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주역들의 터 동판(광주 YMCA)
광주YMCA가 창립되기 전에는 학생YMCA가 있었으며 1911년 광주 숭일학교에 조직되었다. 숭일학교는 1908년 유진 벨(Rev. Eugene Bell) 선교사가 광주남학교로 개교한 학교였다. 숭일학교YMCA가 활동하는 것을 듣고 서울에서 이상재, 김필수, 신흥우가 광주YMCA 설립을 지원하면서 광주YMCA가 창립되었다. 광주 YMCA는 1920년 7월 29일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오웬 기념각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광주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였던 최흥종 목사가 3대 회장을, 최영균이 총무가 되어 3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함께하였다. 광주제중병원 직원과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직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광주숭일학교 교사였던 20대 청년 최병준이, 총무에는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철이 선임되었다. 광주 YMCA의 초창기 주요 사업은 지덕체 운동을 목표로 했으며, 하기순회전도대회를 실시하고, 광주유치원을 개원하고, 서북여자야학을 개학하고, 광주숭일학교에서 노동야학을 개시했으며, 농촌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회관이 없어 북문밖 교회나 오웬기념각, 흥학관, 숭일학교공업부과 체육관, 유치원, 부동교 건너편 녹성구락부 등을 활용하였다. 1924년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가 3대 회장이 되고, 최영균이 총무가 되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인준을 받았다.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가 시무하던 북문밖교회의 유치원에 간판을 달았다. 1933년 고든 어비슨(Gordon Avison) 선교사의 집(현 백운동)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YMCA농업 실습학교를 세웠다. 광주YMCA는 1938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예속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1944년 12월에 자진 폐회하였다. 광주YMCA는 창립 이후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자진 폐회할 때까지 광주의 정신과 문화 경제, 사회의 발전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회원 대부분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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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권 문방구점, 장재성 빵집
독립운동가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 점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던 장재성의 빵집이 있던 옛 터이다. 김기권(金基權)은 1926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항일 학생운동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김기권은 성진회가 해산된 이후 전라남도 광주 지역 내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1929년 학생소비조합 형태의 문방구점을 지금의 금남로공원 자리에서 운영하였다. 한편, 김기권과 함께 활동하던 장재성(張載性)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인근에 빵집을 열었다.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은 성진회 해산 이후 광주학생운동의 핵심 기구가 된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의 연락 및 비밀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운영에서 나오는 소득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김기권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되었고 문방구점도 폐업하게 된다. 1969년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점 자리에는 한국은행 광주지점 건물이 세워졌다. 이후 2003년 한국은행 광주지점이 상무지구로 이전하게 되자, 광주광역시가 부지를 매입하여 금남로공원을 조성하여 2006년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현재 금남로공원 출구 방향에 있으며 금남로공원 조성 이후 이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으나, 2019년 광주광역시에서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여 그 뜻과 의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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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광주지방재판소 표지석
'옛 광주지방재판소 터'는 광주광역시에서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을 맞아 설치한 표석이다. 1907년 광주지방재판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으며 1912년 광주지방법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말 의병에 대한 재판부터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에 대한 1심 재판이 진행되던 곳이다. 대한제국은 1907년 통감부(統監府)의 강요에 의해 근대적 재판제도의 운영을 위한 재판소 설치와 관련된 법률을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광주지방재판소이다. 1907년 12월 23일 설치되어 1908년부터 운영하였다. 1912년 일제는 재판소를 법원으로 개칭하였는데, 이에 따라 1912년 3월 18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광주지방법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광주지방재판소는 단층 목조 건물이었으며 20년 넘게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사용되었는데, 1929년 본관을 2층 콘크리트 슬라브 구조의 건물로 개축하였다. 1952년 광주고등법원이 설치되었고, 1969년 전라남도 광주시 지산동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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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 장매성 집 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장재성·장매성 남매의 집 터이다. 장재성은 1908년, 장매성은 191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회계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태어나 두 사람은 안정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재성은 운동도 잘해서 학교 야구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6년 11월 당시 광주고보 5학년이었던 장재성은 광주고보생·농고생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총무는 왕재일, 회계는 장재성, 서기는 박인생이 맡았다. 하지만 성진회는 활동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 해산했다. 1927년 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장재성은 1929년 6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돌아온 장재성은 ‘조직적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광주 시내에는 ‘장재성 빵집’, ‘김기권의 문방구’가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에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광주여고보에서는 장재성의 누이동생 장매성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날 때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치열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광주여고보에서 맹휴가 잇달았다. 1928년 11월 광주여고보에서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는데, 소녀회라고도 불렸다. 장재성과 장매성은 독서회중앙부의 조직을 통해 학생을 동원하고 격문을 배포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 내려온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에게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1928년 11월 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흥학관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11월 12일 시위에는 동참하지 못했으나 이틀 후인 11월 14일에 본격적인 시위에 참여했다. 1930년 1월에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석방되기 전까지 시험에 응하지 말자고 한 백지동맹에 나선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결과 장재성은 1931년 6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1931년 10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1년 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했고, 장재성은 1934년 4월 만기 출옥했다. 장재성은 출옥 후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상경과를 졸업,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 결성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38년 2월 재차 검거되었다. 한편 장매성은 1938년에 광주고보생으로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와 결혼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장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하고 광주청년동맹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48년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처형당해 43세의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소녀회 관계자인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반면 장재성은 광복 이후의 활동과 행적 때문에 국가공훈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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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광주역 표지석(광주학생운동 시위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본 표지석이 놓인 광주역 터에서 일어났다. 당시 광주는 통학하는 지방 학생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으므로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이 여러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29년 11월 3일 메이지절, 개천절(음력), 그리고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에게 전신이 되는 성진회 창립 3주년을 기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 경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상현이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이 전체적인 투쟁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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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감옥 터
본 표지석이 놓인 곳은 한말의병,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곳이다. 1908년 광주감옥이 설치된 이래로 1923년에는 광주형무소, 1961년에는 광주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어 1971년까지 유지되었다. 현재 광주광역시에 의해 동구 동명동 200-12에 독립을 향한 치열한 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던 곳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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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시위지, 기삼연 의병장 순국지
본 사적이 놓인 곳은 광주 3.1 운동 만세 시위지이자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지이다. 광주 3.1운동 만세 시위란 1919년 3월 10일에 양림동의 기독교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일곡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온 시민 등 1천여 명이 부동교 밑 광주천변으로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던 사건이다.한편, 의병장 기삼연(1851 - 1908)은 1907년에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한말 호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인물로,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호송된 후 재판없이 총살되었다. 이곳 광주천변 모래사장이 기삼연이 총살된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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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작은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광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광주군 광주면 부동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 일대]에 약 1천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양림동 쪽에서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에서 모여들었다.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들이 몰려왔다.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 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광주지방법원(광주군 광주면 북성정 14)[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3가 1-11]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광주군 성내면 성안)[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가 35 충장서점]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3일에는 광주읍 큰 장날을 이용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6일에는 송정면(松汀面) 송정리(松汀里) 정거장 앞 광장에서 보통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한편 기독교인이자 제중의원(濟衆醫院)[현 광주기독병원]의 회계로 있던 황상호 등은 문서 배포를 통한 독립운동 확산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중의원 지하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제1호는 1919년 3월 13일 300부가 제작되었고, 제4호까지 발행되다 일경에 적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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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시비
김윤식(1902 - 1950)의 이명은 김영랑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康津面) 남성리(南城里) 자택에서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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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정(석아정)기념비
최원순(1896 - 1936)은 1917년 3월 일본 도쿄 와세다(早稻)대학교 정경과(政經科)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29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학생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고국의 처지를 생각해 낭비 경계와 학업 충실에 대해 호소했다. 이후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유학생대회에 참여해 조선청년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실행방법 등에 대해 의논했다. 1922년 6월 귀국한 후 상하이(上海)의 정일성(鄭一聲), 고권삼(高權三) 등과 연락하며 러시아, 중국 등의 국제정세와 독립운동 등의 소식을 교환했다. 1926년 8월 22일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재직할 때 동아일보 1면의 「횡설수설」 코너에 일제의 공산주의자 체포, 언론 탄압, 집회 금지 등을 언급하며 일명 ‘문화정치’에 대해 비판했다. 1927년 1월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 조직을 계획하고 3차례에 걸쳐 발기인회를 개최하는 데 참여했다. 한편으로 신석우(申錫雨)를 대표로 내세워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교섭해 ‘정치운동은 하지 않고 연구에 머문다’는 제한적인 조건으로 설립 인가를 얻었다. 이로써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기회주의 일체 부인’을 포함한 강령을 결의했다. 최원순은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과 조선웅변연구회 창립 등에 참여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최원순은 도쿄 유학 중에 2.8 독립선언에 참여해 체포됐다가 방면됐다. 이러한 항일적 행동으로 이른바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돼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항일적 기사 게재로 인해 1926년 10월 4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해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월로 감형됐다. 그러나 상고를 제기해 1927년 2월 17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면소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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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범기념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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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에 조성한 탑이다. 탑은 기단 · 탑신 ·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둥근 화강암의 하층 기단 사방에는 탑을 향해 만곡(彎曲)한 5단의 계단을 두었는데 해자를 건너면 탑과 주변 지역이 연결된다. 상층기단 전면에는 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습을 부조한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그 위의 하층 탑신부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구를 3단으로 새겼다. 탑신 전면에는 세로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光州學生獨立 運動記念塔) ’이라 쓰인 이승만 대통령 친필 휘호를 새긴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회오리치는 횃불 모양의 수연을 관통하는 모습을 구현하였다. 기념탑은 불교의 전통적 화강암 탑의 구성을 따랐지만, 전면에 역사적 사건을 시각화한 장치인 청동부조판을 두었다. 가로로 긴 청동판의 좌측에는 궐기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분노에 가득한 표정의 남학생, 책을 든 채로 궐기하는 학생 등의 모습을 새겼다. 이는 1929년 10월 30일 통학열차에서 촉발된 역사적인 사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한편 상륜부에 연화 대신 불꽃문양을 두고, 기단부를 둥글게 하고 다보탑처럼 사방에 계단을 둔 점 등은 전통적 도상을 영구적인 기념물에 적용해 변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기념탑의 주변을 정비하였고, 이후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영역 일부를 광주학생운동 발상지로 기념화하며 199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는데 기념탑도 이때 이 영역에 포함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하여 11월 3일부터 광주에서 시작되어 11월 12일에 두 차례의 학생시위를 거쳐 1929년 11월 말에서 1930년 3월 혹은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학생독립운동을 말한다. 이후 그해 12월에는 경성부와 수원부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1930년 5월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 학생 항일 시위로 변모,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