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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동상
윤희순(1860~1935)는 1895년 의병장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가(義兵歌)", "의병군가(義兵軍歌)", "병정가(兵丁歌)" 등을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해서 의병운동을 고취하고 부녀자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죄상을 꾸짖었다. 1907~1908년의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여자의병 30여명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서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柳濟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1935년에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廟官屯)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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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3.1운동 본거지 표지석
춘천은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고, 강원도 경무부를 맡고 있던 헌병사령부가 위치해 삼엄한 감시를 펼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일찍부터 천도교 평강교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을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에 독립선언서를 춘천지역에 배포하려던 임종한(林宗漢)과 신윤철(申允喆)이 1919년 3월 4일 체포되고 독립선언서가 압수당하였다. 3월 7일에는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3월 10일경부터 천도교 봉훈(奉訓)인 윤도순(尹道淳)· 천도교 교구장(敎區長)인 이준용(李俊容)·박순교(朴順交) 등 천도교인들이 비밀리에 만세시위를 추진하였으나, 윤도순이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북면 만천리(北面 萬泉里)·가연리(佳淵里)·송암리(松岩里)를 돌아다니면서 주민을 계몽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됨으로써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후 3월말 경에 이르러 이준용·박순교·허기준(許基俊) 등이 3월 28일 춘천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8일 일제 헌병과 수비대가 춘천 시내를 삼엄하게 경계하였지만, 이들은 태극기를 숨겨가지고 춘천 장터로 들어가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장터를 경계하던 헌병보조원 허현(許鉉)은 총을 버리고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 수비대가 이준용·박순교·허기준·허현 등 주도인물들을 체포하자, 만세시위는 끝나고 말았다. 박순교(1869~1946), 윤도순(1860~1930), 이준용(1860~1945), 허기준(1886~1961), 허현(1886~1955)은 1919년 3월 28일 춘천읍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천도교인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수십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25일 박순교, 이준용, 허기준, 허현은 징역 6월형을, 윤도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는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박순교, 허기준, 허현에게 추서했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윤도순에게, 1992년 이준용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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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독립운동사적지 안내판
김상옥(1889~1923)은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붙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료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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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년 기념관
주재년(1929~1945)은 국민학교 재학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 율림리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 '일본놈 져라', '조선만세', '조선지광'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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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재 공적비
한귀재(1911~1980)는 1931년 1월 서울 종로에서 김기범, 진옥진 등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재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하여 고학당 및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한 후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다 체포되었다. 1931년 2월말경 고학당에 재학하고 있던 한귀재는 김기범 등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을 재조직했다. 김기범이 중앙부책임 겸 서무부, 그는 조직부를 맡았다. 한귀재 등은 조선학생전위동맹의 세포조직으로 각 중등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귀재는 먼저 고학당의 독서회 조직을 맡았다. 이후 한귀재 등은 오문현 등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매주 토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 독서회 결성을 추진했다. 독서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해갔다. 한귀재는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1934년 8월 6일 가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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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계 묘
김재계(1888~1938)는 전라남도 장흥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의 장흥 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독립운동성금 5백원을 가져가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인접 교구에 보내었으며, 면 별로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화하여 3월 15일 장흥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총지휘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른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 교도로 하여금 안심가(安心歌)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고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를 암송하며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릴 것을 지시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보고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멸왜기도」를 실시하다가, 1938년 2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 수행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일만에 그를 기소유예로 석방했으나,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되자 얼마 후에 바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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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암 집
박호암(1912~1984)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1929년 4월 숙부 박노영(朴魯泳)을 찾아 부산에서 상해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강만 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4년 봄 중국군관학교 낙양 분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한국혁명군인회에 참가하였다. 1935년 4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경 에서 조직된 조선민족 혁명당에 입당하였으며, 특수공작 임무를 띠고 북경·천진 지구로 파견되었다. 북경에서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36년 5월 박태양(朴泰陽)·윤여복(尹汝福)·홍종민(洪鍾民) 등 동지들과 함께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6년 12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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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 묘
정두흠(1832~1910)은 187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88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종묘대제(宗廟大祭)에 대축관(大祝官)과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등을 올려 정치도의를 바로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전남 장흥군에서 국권 상실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 4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202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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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 유적지
정두흠(1832~1910)은 187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88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종묘대제(宗廟大祭)에 대축관(大祝官)과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등을 올려 정치도의를 바로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전남 장흥군에서 국권 상실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 4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202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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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서원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악랄한 수탈과 농민착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지방 등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는데 강원도의 경우 삼척 임원리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삼척의 향토지와 나이 드신 분들의 고증에 근거하여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에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유지는 결국 일본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개인 소유의 임야를 국유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 주민 5백여 명이 운집하였습니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하며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본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해 임원리에 왔는데, 이 때 뒷산에서 몰래 사진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들은 격분하여 측량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고 불에 태웠다. 그러자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된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했고, 그 결과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덕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8년 4월 18일에 산양서원 묘정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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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녀 집(최시형 피체지)
원진녀의 집은 최시형이 1898년 원주에서 붙잡힌 바로 그 장소이다.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당시 최시형은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관군의 추적을 피해 고산리 송골마을 원진녀의 집으로 피신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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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집(경기)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