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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의적비(송정공원)
이기손(1877-1957)은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 나주, 함평)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호는 금재(錦齋), 용섭당(龍攝堂)이며 이칭으로는 연해(淵海), 금재(錦齋), 연해(淵海)로 불렸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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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술 구 묘
오성술 (1884-1910)은 김태원 의병부대를 이어 받아 활동한 의병대장으로 오인수(吳仁洙)라고도 불렸다. 오성술은 1905년 의거할 것을 결심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김태원(金泰元)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김태원이 전사하자, 의병장이 되어 전라남도 담양에서 일본군 지휘관 요시다[吉田]를 사살하였다. 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나주에서 밀정 황도현(黃道玄)의 재산을 탈취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1909년 1월 30일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모리[森十內]의 집을 습격하여 2,500원 상당의 물품을 탈취하였으나, 곧 붙잡혔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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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 공적비
이병채(1875-1940)는 관동지방에서 활약한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후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1896년 민용호(閔龍鎬)가 중심이 되어 설치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의 의병장이 되어 최중봉(崔重峰) 등과 관동지역의 사림 및 백성들에게 포유문(布諭文)을 보내고 그 기세를 높여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진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그 해 가을에는 관군의 포위망에 싸여 부득이 그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서울 남산골에서 의병 1,000여명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일대격전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국권이 침탈된 뒤 1913년에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서 전라남북도순무중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만주 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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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재
시기재(始基齋)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원당부락에 있는 상평공(喪平公) 오자치(吳自治)[1426~?]를 배향한 재실이며 1913년에 건립되었다. 오자치는 나주 오씨의 중시조로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은 나주 오씨의 집성촌 중 하나로 의병장 오성술과 오상열에 대한 기념과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오상렬은 1906년 김태원 의병진에서 도통장이 되어 전라남도 광주·함평·나주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용진산에서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적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오성술은 김태원 의병장이 1908년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의진을 수습하여 인솔하였으며 1909년 군자금 모금 활동이 알려지면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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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수재
율수재(聿修齋)는 최익현(崔益鉉)이 제주도·흑산도에 유배 되었을 때에 최익현을 보필하던 제자 박해량(朴海量)과 박해량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박현동(朴玄東)이 태어난 곳이자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박현동(1886~1962)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서일(瑞日), 호는 하은(河隱)이다. 박현동은 율수재(聿修齋) 살림채에서 태어났다. 율수재는 1886년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였던 아버지 박해량(朴海量)이 건립하였는데 이후 박현동의 강학 공간으로도 쓰였다. 박현동은 최익현 의병진에서 좌익장(左翼將)으로 최익현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율수재는 1897년 박해량의 사후에 아들 박원동(朴源東)이 중건하였으며 이후 박해량의 손자인 박선규가 관리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재각(齋閣)으로 사용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 장수마을 서쪽 방향에 있으며, 어등산 아래에 있는 수남제 인근에 있다.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평기와 팔각지붕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우측 2칸을 비롯한 좌측 1칸이 대청마루 거실로 꾸며져 있다. 좌측 거실의 옆에 별도의 1칸 다락이 설치되어 있고, 중앙의 2칸이 판자마루로 터져 있다. 칸마다 위아래로 열고 닫는 벽괘용 새살창문이 달려 있고, 중앙의 2칸 마루를 제외한 좌우의 거실 3칸이 모두 칸막이 밀창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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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순절비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義兵將沈南一殉節碑)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의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해 1972년 1월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다. 3개 층으로 좌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순절비를 세웠다. 비석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義兵將沈南一殉節碑)를 새겼고 비문은 노산 이은상(李殷相)이 지었으며 글씨는 신호열(辛鎬烈)이 썼다. 순절비 건립에 찬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방명비(芳名碑)가 있다. 심남일(1871~1910)은 본명은 수택(守澤), 호는 덕홍(德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심남일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 영암. 해남, 보성, 남평, 능주, 나주 등지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능주 풍치(風峙)(지금의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화악산 기슭)에서 체포되어 1910년 경상북도 대구 지역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심남일은 자신의 항일 투쟁을 기록한 일기 및 실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심남일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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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항일 사적비
신동욱의 항일 사적비이다. 2021년 8월에 제작되었으며 광주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신동욱(1870-1943)은 1909년 전남 함평군(咸平郡)에서 전해산의진(全海山義陣)에 식량을 지원하고, 1914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전남 함평군 대표로 임명된 사실이 확인되어 2016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전해산의진은 1908~1909년 사이에 전남 서부 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자발적으로 군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신동욱은 전남 함평에 전해산의진이 주둔하자 이때 삶은 돼지고기와 술을 지원하였다. 이 밖에도 김태원의진(金泰元義陣)이나 심남일의진(沈南一義陣) 등에도 군수품을 제공하였다. 1912년 음력 9월 본격적으로 결성된 독립의군부는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항일비밀결사였다. 독립의군부는 1914년 3월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는데, 신동욱은 이때 함평군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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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의병부대 주둔지
기우만(1846-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다. 참봉 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고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기우만은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유저로는 『송사집(松沙集)』이 있으며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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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향 기념동산
최수향(이명 최현숙(1903~1984)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서 태어나 광주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서 일어난 광주만세에서 직접 제작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중 최연소자(당시 16세)로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야학을 지도하며 청소년에 대한 계몽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이바지하였으며, 1928년부터 1940년 8월까지 『동아일보』 광주지국 총무 겸 기자로 임명되어 민족정신 계몽과 민족지 보급을 위해 활동하였다. 최수향은 1984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 부군은 방원 김용환(方圓 金容煥, 1900-1969) 이다. 1984년 3남인 김양균이 조선총독부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던 1919년 재판 판결문을 발견한 뒤 1986년 애국지사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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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묘
최수향(이명 최현숙)의 부군이며 제 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방원 김용환(1900-1969)의 묘이다. 방원 김용환은 광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흥학관(동구 광산동)의 중심 인물이면서 동아일보 광주 지국의 기자였다. 현진 최현숙 여사와는 흑학관에서 만나 3년의 열애 끝에 1924년 8월 결혼하여 슬하에 11남매를 두었다. 김용환은 최현숙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고 기자가 되기를 권하여 1928년부터는 부부가 함께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방원 김용환은 한국민주당 전남도당을 창당하고 이후 광주에 상주하면서 국민당 전남도당, 민주국민당 전남도당, 국민회 전라남도본부, 민주당 전남도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 7·29 총선 때 제 5대 광주 을구 제5대 민의원 선거(현 국. 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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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일학교
숭일학교(崇一學敎)는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광주 최초의 중등학교로 꼽힌다. 숭일학교는 1907년 3월 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유진 벨(Eugene Bell)이 설립한교육기관으로 설립 초기에는 비인가 학교였으나, 1908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4년제 소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초대 교장으로 프레스턴(John F. Preston)[변요한(邊約翰)]이 취임하였다. 1910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번지] 일대에 광주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3층의 교사(校舍)를 준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고등과를 4년제 중학교로 개편하여 중등학교 교육 과정을 마련하였다. 숭일학교의 교사진과 학생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중등과 설립 초기부터 일제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일본 도쿄[東京]의 유학생들 주도로 2.8독립선언이 일어났고, 유학생 정광호를 통해 「2.8독립선언서」가 광주에 전달되었으며, 광주에서의 독자적 만세운동이 기획되던 중 서울에서 진행된 3.1운동 관련 정보들이 알려졌다. 당시 광주 3.1운동을 준비하던 그룹 내에는 개신교인들의 비율이 높았고, 김강·최병준 등의 숭일학교 교사들도 중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작은장터에서 시작된 광주 3.1운동 당시 숭일학교 학생들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광주천을 따라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면서 시민과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광주경찰서 앞까지 진출한 뒤 해산될 때까지 선봉에 섰다. 이튿날인 3월 11일에도 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 행진을 진행했다. 광주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숭일학교 학생과 교사 28명이 체포되었고, 학생 송광춘은 대구감옥에서 옥사하는 등 숭일학교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일학교 내에서의 민족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어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31년 7월 31일 숭일학교를 폐쇄하게 된다. 1931년 숭일학교 폐쇄 이후, 남아 있던 숭일소학교도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숭일학교는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1일 복교되었고, 1946년 5월 31일 숭일중학교로 정식 인가되었다. 1951년 학제 변경에 따라 숭일중학교와 숭일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71년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93년 다시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으로 이전하였다. 기존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지역은 매각되어 교사 등은 철거되었고, 여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지구로 이용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을 맞아 전라남도 광주 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옛 숭일학교 만세 모의 장소'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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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기념관
최흥종(1880-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목사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다. 최흥종은 1904~1905년 사이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김윤수(金允洙)와 함께 양림리교회(楊林里敎會)를 중심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순검(巡檢)이 되었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徐丙冀)와 함께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순검으로 있으면서 일경에 체포된 광주·전남지역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거나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19년 3월 2월 김필수(金弼秀)·김철(金鐵)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어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을 나눠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6월 출옥하여 8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의사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 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시베리아선교를 시도하였다가 좌절된 후 1923년 광주소작인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4년 광주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광산회 총무(1923), 서선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 금정교회 목사(1924~1925),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고보창립 기성위원(1926), 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에 나섰으나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 귀국하였다. 이어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어 민족운동을 재개하였고,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1927), 광주교육보급회 이사(1928),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1928),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1928)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7월 제주도 모슬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면서 구라사업(救癩事業)과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1937년 1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빈민들과 함께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고, 8월 17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全南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1964년 12월 「유언장」을 작성하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후 5월 14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최흥종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