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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조 도해비
박무조(1859 - 1917)는 경북 군위(軍威) 사람이며, 이명은 박능일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한을 품고 살다가 호적령(戶籍令)이 강제(强制)되자 취적(就籍)을 거부하고 1914∼1917년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을 이끌고 예안(禮安)·풍기(豊基)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17년 7월 20일 영일군(迎日郡) 우목리(牛目里) 앞바다에서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 조선일민(朝鮮逸民) 박능일(朴能一)"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순사(投身殉死)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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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동 표성비
박현동(1886-1962)은 전라남도 광주군 와곡면(光州郡 瓦谷面)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공주·순창 등지에서 후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국운이 날로 기울어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게 되자 "근고팔도민서(謹告八道民書)"라는 격문을 각지로 띄웠다.박현동은 그 격문을 보고 면암 의진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하여 의병 200여 명과 총 20∼30정으로 무장하고 광주 수비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공주(公州)를 떠났다. 다시 전북 임실(任實)에서 의병 80여명과 총 50 정을 추가하고 면암의 근거지인 순창(淳昌)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4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광주·전주·공주 등지로부터 면암 의진을 저지하기 위해 집결한 진위대와 수비대를 상대로 순창 읍내에서 교전하였으나, 의진의 형세가 정비되기 전이었으므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련의 의병활동이 적에게 발각되어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밀계가 이루어지자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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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의적비(본량초등학교)
이기손(1877-1957)은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 나주, 함평)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호는 금재(錦齋), 용섭당(龍攝堂)이며 이칭으로는 연해(淵海), 금재(錦齋), 연해(淵海)로 불렸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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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렬 순절기적비
오상렬(1879-1907)은 을미사변 후 김산향교에서 여영소와 함께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오인섭(吳寅燮). 자는 기완(起完), 호는 의재(義齋). 전라남도 광산 출신.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이다. 1906년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전수용(全垂鏞) 등과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김태원을 의병장으로 하고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광산 대명동 산골에 무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고, 광주 무등산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2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나주 석문산(石門山)에서 5일간에 걸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뒤 광주 무등산, 함평 무동촌(無洞村), 나주 풍치(風峙)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나주군 대량면 용진산(勇珍山) 사호치(沙湖峙)에서 도통장으로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하여 4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는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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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렬 묘
오상렬(1879-1907)은 을미사변 후 김산향교에서 여영소와 함께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 오인섭(吳寅燮). 자는 기완(起完), 호는 의재(義齋). 전라남도 광산 출신.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의 후손이다.1906년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전수용(全垂鏞) 등과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김태원을 의병장으로 하고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광산 대명동 산골에 무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고, 광주 무등산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2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나주 석문산(石門山)에서 5일간에 걸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뒤 광주 무등산, 함평 무동촌(無洞村), 나주 풍치(風峙)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나주군 대량면 용진산(勇珍山) 사호치(沙湖峙)에서 도통장으로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하여 45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는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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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마을(어등산의병 전적지)
이 마을은 박산마을, 또는 박뫼마을로 불리는 의병마을로 광주광역시 어등산 자락에 자리한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이자 학자 송천 양응정이 들어온 이후 ‘박산(博山)’, 또는 박뫼라고 불리게 된 이 마을은 유교의 전통윤리인 충(忠), 효(孝), 열 (烈)을 지켜온 양씨 가문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우리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의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 곳이다. 박산마을에 세워진 양씨삼강문은 제주 양씨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양응정의 아들인 양산숙이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고 정유재란 때는 양응정의 부인과 아들, 딸, 며느리 등 일가족이 왜적에게 굽히지 않고 자결했다. 또 정묘호란 때에는 양응정의 손자 양만용이 의병을 일으켰다. 박산마을에는 어등산 전투지이기도 했다. 어등산(293m)은 광주와 장성 그리고 나주와 함평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지리적 요충지로서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이 곳의 김태원, 김준, 조경환, 양동환, 김원범 등 의병장을 포함한 여러 의병이 어등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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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어등산 등산로)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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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 표지석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 앞)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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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김태원 토굴)
김태원(1870-1908)은 전남 장성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김씨이다. 별명은 김준(金準) 또는 김참봉.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이며 의병장 김율(金聿)의 형이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의 벼슬을 지냈으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김태원은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으며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김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 때 전라남도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태원은 의병부대를 호남의소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강화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장성 토물/토천[土泉] 뒷산에서 일본군 테츠도 산다 등을 포함하여 수십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일제는 김태원의 부대를 탄압하기 위해 특설 순사대를 편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태원의 동생 김율 의병장이 전라남도 화순군 송정리 소지방에서 붙잡혀 구금되었다, 또한 김태원의 전령사 이문경도 전라남도 함평군 편능면에서 체포되었으며 김태원의 비서 김규철이 전라남도 광주군 소고룡면 두동리에 있는 민영두의 집에서 체포된다. 심문과정에서 일제는 김태원이 어등산 자락에 유진하는 것을 알아내 포위하였다.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魚登山)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서 부하 김해도 등과 전투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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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서봉마을 입구)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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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마당바위)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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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 집
한국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이다. 김영랑·정지용·정인보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대표작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시문학』, 『문예월간』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 『박용철전집』2권이 있다. 이 집은 선생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슬레이트 지붕을 1995년 원래 초가로 복원하였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은 부엌이며 가운데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5칸이며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