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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묘
이상호(1876 - 1949)는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주방전투에 참전한 의병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고종의 시종관으로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게 하자, 이상호는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예안·안동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의병을 인솔하여 정환직과 합세하여 청송(靑松)·진보(眞寶)·청하(淸河)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고, 소총 80정,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주방전투(周房戰鬪)에서의 부상으로 은신, 치료중 체포당하였으나 탈옥, 관동지방에서 은거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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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1의거 기념관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2일 청하장날 윤영복·오용간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김윤선(金允先, 1865~1932), 김종만(金鍾滿, 1887~1967), 김진봉(金鎭奉, 1898~1959), 안덕환(安德煥, 1866~1924), 안도용(安道用, 1893~1921), 안상종(安常鍾, 1893~1925), 윤영복(尹永福, 1896~1943), 안천종(安千鍾, 1870~1940), 안화종(安和鍾, 1888~1965), 오용간(吳用干, 1869~1941), 이명만(李命滿, 1900~1986), 이영섭(李泳燮, 1898~1960), 이준석(李俊石, 1896~1955), 정재선(鄭在先, 1898~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포항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1월 1일 이 기념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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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호 집
이준석 지사의 부친이자 이 교수의 증조부인 이익호 선생은 일찍이 구한말 상경해 배재학당에서 수학 후 민영환 대감 휘하에서 궁내부 주사로 공직생활을 했다. 하지만 을사늑약 부당함을 호소하며 1905년 민 대감이 자결하자 그도 고향 송라면으로 낙향해 대전리교회·유계리교회·청하교회를 세웠고, 청하향교 장의와 청하면장도 역임하며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익호가 호열자(콜레라)로 추정되는 병으로 45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자, 그 뜻은 장남 이준석과 3남 이준업에게 계승된다. 이준석(1896 - 1955)은 경상북도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의 청하면 덕성리(淸河面德城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윤영만(尹永滿) 등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덕성리 장날인 3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1개, 소형 태극기 20여개를 만들고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영복으로부터 이같은 거사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3월 22일 오후 1시경, 윤영복·오용간·윤도치(尹道致)·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尙鍾)·이준업(李俊業)·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과 함께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덕성리 일대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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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1의거 기념비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당시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윤영복을 비롯한 14명이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6년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이를 알리고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2월에 유품을 보존·전시하는 기념관과 함께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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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독립의거 기념비
보경사 입구의 비석은 경북에서 3·1만세운동을 선도한 포항지역에 기념물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3·1동지회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은 성금으로 지난 1970년 3월 22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포항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출신 의사를 포함하여 3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1동지회는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26명의 의사들이 송라면 조사리 교회에 모여 3·1운동과 항일투쟁의 결속을 다지는 취지로 1920년 4월 20일에 결성한 비밀단체다. 1929년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으로 해산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결성하면서 청하·송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동지들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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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술 구 묘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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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술 집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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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집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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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수 사적비
구회수(!880 - 1950)는 경북 영일 출신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군사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의병 진영이다.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은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의진에는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鄭純基),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군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太彦),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도포장 백남신(白南信) 등이 포진하였다. 구회수는 영덕(盈德)·영해(寧海) 방면에서 의병 모집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참모장 손영각의 사위로, 1907년 9월 재편성된 제2대 대장 정환직 진용의 도총장 구한서(具漢書)의 종질(從姪)이었다. 구회수는 보현산(普賢山)과 동대산(東大山)의 중간 영일군 죽장(竹長)에 거주하면서 산남의진의 군사 모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영천·영일·청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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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안, 양한기 집
양제안(1860 - 1929)은 대한제국기 정용기의 산남 의진에서 상주, 선산지방의 책임자로 활약한 의병장.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도(碧濤). 경상북도 영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다.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李起燦)의병진의 중대장으로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청주·음성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때 상주·선산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산남의진의 봉기 후 주로 진후(陣後)에서 활약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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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기 묘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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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근 집
강대근(1891 - 195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여 청하(淸河)·흥해(興海)·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岩) 전투에서 패해 전상(戰傷)을 입고 피신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