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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돈 흉상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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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형 집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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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형 재실(혜사정)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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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흉상
최준(1884 - 1970)은 경북 경주(慶州) 사람이다. 그는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붙잡히기도 했던 그는 3·1독립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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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 항일독립운동기념비
이주호(1921 - 2018)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동교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부원중에 상급생(8회)이 졸업을 하게됨으로써 그 뒤를 이어 그와 유흥수(柳興洙)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에 그는 유흥수·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大鳳町) 소재 그의 하숙집에(유흥수와 동일 하숙)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즉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 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동 결사는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가져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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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동 추모비
엄주동(1897 - 1974)은 경북 영일(迎日, 현. 포항) 사람이다.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재학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15년 3월 서울에서 이우용(李雨用)·최규익(崔奎翼)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한국인 자신이 부흥시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고 이진석(李鎭石) 등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한국혼을 심어주는 정신적 교육으로 국권회복을 기약하고,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종 사업을 계획하던 중 1917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한편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1916년 도사교(都司敎) 나 철(羅喆)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봉심(奉審)의 길을 떠나 순국할 때 김두봉(金枓奉)·나주영(羅柱永) 등 5인과 함께 수행하였다. 교주 나 철(羅喆)이 순국한 후에는 만주로 망명, 서 일(徐一) 휘하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고, 1920년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1921년 8월에는 상해(上海)로 가 신규식(申圭植)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예관( 觀)이 순국한 후에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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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문 추모비
장헌문(1870 - 1929)은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 죽정리 출신이다. 1896년 을미 의병이 일어나자 영일군에서 의병에 참가하였으며 1905년 을사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5월 김재홍, 김복선 등과 거의를 결의하고 3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장헌문 의병진은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정환직(鄭煥直)과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더불어 호각의 세를 이루었다. 1909년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10월 7일 대구 재판소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에 출옥하였다. 1926년 1월 25일 옥고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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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유적비
김인수(1898 - 1939)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 좌면(左面) 법정사(法井寺)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스님인 김연일(金連日) 등은 1918년 9월 19일, 신도 30명에 대하여, "왜노(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倂合)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不遠)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나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商人)들을 도외(島外)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거의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로 칭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으로 임명한 후, 김인수 등에게 각각 반수(班首)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김연일은 도대장 이하 군직을 명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항일봉기군은 400여 명이나 되었다. 김연일·김인수 등의 주도자들은 봉기군을 지휘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서귀포(西歸浦) 호근리(好近里)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경들이 미리 서귀포에서 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자,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그곳에서 일경과 대치하도록 하고, 그와 김인수는 봉기군 일부를 데리고 중문주재소(中門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장 길원(吉原)은 갑작스럽게 닥친 봉기군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재소를 파괴·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였으며,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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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제 공덕비
김인제(1881 - 1962)는 1881년 10월 기계면 봉계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심경(四書三經)에 능했다. 장년이 된 김인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일제에 착취당해 희망조차 잃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34살 때인 1914년부터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진지의 민풍과 산업을 견학했다. 마을로 돌아온 김인제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김성진을 찾아가 마을을 부흥시킬 것을 의논한 뒤 마을에 성행하던 음주·도박 등 나쁜 풍습을 교정하기 위해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해 농업개량과 근검절약을 하는 등 마을 개혁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점 근검절약의 풍토가 마을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상의를 통해 당시 마을의 주산품인 면을 공동판매하고 공동저축을 하는 등 마을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업적 중 선구적 백미는 역시 교육이었다. 기언략에 "강육강식의 세계에 맞서 나갈 무기는 단연코 교육이라고' 주장하며 일찍이 서당을 열어 유가문화의 바탕인 한학을 지도하는 한편 문맹퇴치의 일환책으로 개설한 야학운영에도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몽매한 인성을 개도하여 윤상을 체득케하고 삶의 의욕과 질을 높여 드디어 약소민족의 설움을 딛고 궁극적 목표인 자력갱생의 활로를 터득케하였다. 또, 김성진과 함께 주민에게 단책형 묘대, 정조식, 녹비재배, 나락의 건조조제 자급, 비료제조 등을 실시하게 했다. 이로써 각종 농산물의 생산액이 종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매우 향상됐다. 해마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근면·자조·협동하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전국 보통학교 교과서에 마을 성공사례를 실어 학생들에게 근면·자조·협동정신을 배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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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흡 창의비
이종흡(1861 - 1919)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항일의병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게 되자, 안동(安東)의 김도화(金道和)·이준구(李俊久)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였다. 1896년 5월 기계(杞溪)에서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합류하여 이준구 등과 함께 참모(參謀)에 임명되어 안동·경주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기계 방면의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청하(淸河) 등지에서 의병을 소모하고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영덕(盈德) 전투에서 김하락이 전사 군국하고 선유사(宣諭使)의 권유로 의진이 해산된 뒤에는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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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원 추모비
윤응원(1874 - 1911)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11월경 박덕삼(朴德三)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가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경기도 가평(加平)·강원도 춘천(春川)·양구(楊口)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12월 6일 춘천군 추곡(楸谷)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여 패한 뒤에는 일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윤태훈(尹泰勳)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1908년 2월 20일경까지 강원도 홍천(洪川) 일대에서 항전을 벌이다 붙잡혔다. 1908년 9월 1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형(流刑) 7년을 선고받고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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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집
이상호(1876 - 1949)는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주방전투에 참전한 의병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고종의 시종관으로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게 하자, 이상호는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예안·안동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의병을 인솔하여 정환직과 합세하여 청송(靑松)·진보(眞寶)·청하(淸河)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고, 소총 80정,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주방전투(周房戰鬪)에서의 부상으로 은신, 치료중 체포당하였으나 탈옥, 관동지방에서 은거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