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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구 묘
장진홍(1895 - 1930)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일명 성욱(聖旭)이라고도 불린다. 1912년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14년 제대한 뒤 비밀항일결사인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하였다. 1918년 이국필(李國弼)과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그곳의 교포청년들을 규합,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9년 귀국해 3·1운동 당시 각지로 순회하며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행한 학살·고문·만행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 해 7월 인천에 입항한 미국 군함의 하사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번역하여 각국에 배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지국을 경영하며 정세를 관망하던 중 1925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국내 활동을 목적으로 많은 무기를 휴대하고 잠입한 이정기(李定基)와 접촉,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1927년 일제의 고관 암살과 중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 먼저 대구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목표를 경상북도지사·경상북도경찰부·조선은행지점·식산은행지점의 네 곳으로 정하였다. 이 해 10월 18일 대구 덕흥여관에 투숙해 4개의 폭탄을 각각 나무 상자에 담아 포장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善)에게 배달하도록 하였다. 박노선은 4개의 상자를 제일 먼저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상자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을 의심한 은행원이 도화선을 차단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또 길 옆에 놓아 두었던 3개가 차례로 폭발하여 일본 경찰 수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은행 건물 유리창이 파괴되었다. 대구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8년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사는 동생 장의환(張義煥)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1929년, 함께 활동하던 이정기가 다시 북경에서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잡힘으로써 은신처가 드러나 잡혔다. 193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상고, 역시 사형이 선고되자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 재판장을 내리쳤다. 1930년 사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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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적읍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조선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발흥(發興)하였다. 이곳 장곡지역에서도 주민의 자발적, 민주적 비무장 만세 의거가 전개되어 유학자 장영조 등 39명의 선사(先士) 중 10여 명이 일제 경찰에 피체(被逮), 구금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루었다. 그 당시 이곳의 애국지사의 보국충정을 기리고 후대에 교훈으로 삼기 위하여 2019년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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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헌 순국기념비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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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목 이두석 집
이수목(1890 - 1978)은 1915년 음력 1월 15일 경북 달성군(達城郡) 수성면(壽城面) 안일암(安逸庵)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단원으로 참가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기로 맹세하고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하였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예지하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 등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두석(1912 - 1938)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왜관(倭舘)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 맹휴를 주동하다가 퇴학당한 정행돈(鄭行敦)·이창기(李暢基) 등과 함께 1932년 4월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활동을 펴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그러던 중 활동내용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2월에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동년 3월 23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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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집(이석고택)
이석(1910 - 1978)의 이명은 이이석이며, 1927년 11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同盟休學)을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에는 서울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라’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이석은 고향인 경북 칠곡군(漆谷郡)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鄭七星)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協議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으나,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8년 2월경 체포되어 4년간 취조를 받고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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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택 순국기념비
이수택(1891 - 1927)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1913년 경북 풍기(豊基)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박중화(朴重華) 등과 함께 도만(渡滿)하여 그해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이종암(李鍾岩)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나, 겨울에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密陽)과 진영(進永)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과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金相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에서 일경에 붙잡혔으나 벙어리 행세로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활동을 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徐相洛)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동년 5월 13일 소위 폭발물취체벌칙과 제령 제7호 위반으로 2년 6월형의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의 여독(餘毒) 끝에 1927년 6월 6일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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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수호기념비
독립수호기념비는 '천지와 같이 이 나라에 살 것이로다. 그 끝까지 이 나라 독립을 수호하리.'라는 문구를 통해 영원히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고 자주권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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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 기념비
지하수(1892 - 1938)는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9일 오후 9시경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평복동(平福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서울에서의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인근의 인동(仁同)이나 성주(星州)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한 뒤 만세시위의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는 4월 9일 마을의 20대 청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2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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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정행국(1896 - 1921)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4년 8월 서울에서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장춘(長春)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왜관청년회(倭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동회의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동창학원(同昌學院)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1년 11월 병보석되었으나 다음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 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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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돈 기념관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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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학원 표지석
동창학원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1922년 4월 7일 왜관청년회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학교로, 개원하자마자 원생이 크게 늘어 한 달여 만에 17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칠곡군 유일의 사학 기관이었으며 채충식 등 청년회 활동가들이 교사로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수목(李壽穆), 박희중(朴喜重), 이상호(李相祜) 등 3명이 자진하여 각자 1백 원의 유지비를 부담하여 운영자가 되기로 한 후 이수목이 중도 탈락하고 후임으로 이강진(李綱鎭)이 참여하여 세 사람이 1년간 350원의 유지비를 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부담액을 내어 놓지 않아 강사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학생 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급기야 폐교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에서 지방비와 향교 재산 수입의 일부를 지원받아 학원 운영비로 사용하였는데, 그 금액은 1년에 약 300원에 달했다. 또 왜관곡물상조합의 보조까지 받아 학원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9년의 큰 가뭄으로 인해 군청과 향교에서는 지원을 거부하였고, 지방 재산가들은 학원에 관심이 없음으로 인해 학원 운영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지방유지 등이 기금을 모았는데, 그 금액이 2백 47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학교 운영의 위기를 넘겼으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32년 6월 20일에는 무기 휴교를 단행하였고, 운영 필요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폐교해야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왜관곡물상조합에서 곡물 매매를 하면서 마련한 수수료로 학원 운영 경비를 다시 충당되면서 폐교의 위기는 넘기게 되었으나 학원의 원활한 운영에는 부족하였다. 그로 인해 학원 시설과 학생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해마다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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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학생사건 기념비
왜관학생사건은 1939년 7월,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민족 차별에 반발, 일본인 교사에게 저항한 일을 이른다. 당시 일제는 대구사범학교 전교생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10일 동안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때 작업 중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오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고 말았는데, 이를 두고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의 행동만 문제를 삼았다. 이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보복하려다 실패하고 말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7명이 퇴학하고 11명이 정학을 당했다. 본 사건을 기억하고자 1984년 11월 5일에 대구사범 심상과 7기생이 본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