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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욱 순국기념비
조현욱(1854 - 1922)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무계동(武溪洞)의 유지 신태휴(申泰烋)·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주민 50여명을 규합하고, 다시 현서면사무소에 있던 구장 및 유지들을 종용하여 그들의 호응을 얻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시장으로 몰려갔다. 도중에 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화목주재소에서 출동한 3명의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에 병탄된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비분하여 투신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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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욱 순절비
조현욱(1854 - 1922)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무계동(武溪洞)의 유지 신태휴(申泰烋)·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주민 50여명을 규합하고, 다시 현서면사무소에 있던 구장 및 유지들을 종용하여 그들의 호응을 얻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시장으로 몰려갔다. 도중에 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화목주재소에서 출동한 3명의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에 병탄된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비분하여 투신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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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상 유허비
임용상(1877 - 1958)은 경북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영덕(盈德)에서 김재서(金在瑞) 등과 더불어 창의군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청하(淸河)·영덕 강구(江口)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1907년 4월에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靑松), 영천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살하였다. 또한 1907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흥해(興海)지방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7년 12월에 정용기 의병대장이 전사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總將)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910년 봄에 해산상태에 처해 있던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안평(安平) 전투에서 체포되어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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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순국기념비
김재수(1876 - 1909)는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7년 10월 15일부터 동년 12월 5일 사이에 박연백(朴淵伯) 의병장 휘하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고 박연백 의진 30여명과 함께 경북 신녕군(新寧郡)·안동군(安東郡)·청송군(靑松郡) 일대에서 정진사(鄭進士)·권대방(權大房)·김명원(金明元)·김연전(金延前)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그후 1909년 1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그해 3월 4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으로 형이 변경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동년 4월 8일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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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사 3.1독립운동순국선열 도량
법전사는 1977년 3월 24일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의 영혼을 안식하기 위해 창건한 것이다. 대웅전은 1977년 건축되었으며, 요사채는 1979년 건축되었다. 2003년 4월 11일 요사채와 일사문을 증축하였고 2004년 8월 27일과 2005년 1월 5일 요사채를 증축하였다. 법전사에는 3.1독립운동순국선열 구국열사봉안 도량도 함께 위치해 있다. 백용성(용성조사) 선생과 변진설(봉암조사) 선생께서는 법전사에서 수행하셨으며, 봉암조사는 용성조사의 제자이시다. 법전사는 봉암스님의 제자께서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최고 접전지역이었던 다부동에 법전사를 창건한 것이다.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변진설(1909 - 1975)은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진설은 1928년 6월 전남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 학우 이경채(李景采)의 퇴학처분에 항거하여 그의 복교(復校)를 지지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과 함께 6월 26일에 교유(敎諭) 7명의 사직 또는 반성을 요구하였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이경채의 복교사항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전개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변진설은 학우들과 함께 맹휴중앙본부(盟休中央本部)를 조직하고 「집행본부경과보고(執行本部經過報告)」, 「광주고보교 학생 일동 항의문」, 「중앙본부격(中央本部檄)」이라는 이름의 문서 수백 통을 등사 인쇄하여 학생과 학부모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맹휴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격문을 제작·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8년 8월 2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변진설은 3개월이 넘게 취조와 심문을 받고,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8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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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집
장석영(1851 - 1926)은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星州)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영남지방의 유림(儒林)으로서 일찍이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國權侵奪條約)인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이 늑결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국왕께 올렸다. 1907년(융희1)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報償會長)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이주개척지의 한교(韓僑)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1919년에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청원문 초안의 작성을 담당하고 여기에 유림대표 137명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이들과 만나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연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타협하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몰려오자, 시장에 모여있던 유림들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가 3천명을 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을 연행하여 시위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겁을 먹은 경찰들이 발포하여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내로 피신시키고 대구로부터 15명의 수비병을 증원받았다.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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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당(장석영 사적)
甪洞書堂(녹동서당)은 회당(晦堂) 장석영이 만년에 지은 강학지소로 1926년에 건립되었다. 장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를 올렸으며, 1907년 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26년 창건 당시에는 만서정(晩棲亭)이라 했으며 녹동서당(甪洞書堂)이라 편액한 것은 사후에 자손들이 명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석영(1851 - 1926)은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星州)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영남지방의 유림(儒林)으로서 일찍이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國權侵奪條約)인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이 늑결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국왕께 올렸다. 1907년(융희1)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報償會長)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이주개척지의 한교(韓僑)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1919년에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청원문 초안의 작성을 담당하고 여기에 유림대표 137명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이들과 만나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연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타협하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몰려오자, 시장에 모여있던 유림들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가 3천명을 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을 연행하여 시위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겁을 먹은 경찰들이 발포하여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내로 피신시키고 대구로부터 15명의 수비병을 증원받았다.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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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 묘
지하수(1892 - 1938)는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9일 오후 9시경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평복동(平福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서울에서의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인근의 인동(仁同)이나 성주(星州)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한 뒤 만세시위의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는 4월 9일 마을의 20대 청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2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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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묘
장석영(1851 - 1926)은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星州)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영남지방의 유림(儒林)으로서 일찍이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國權侵奪條約)인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이 늑결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국왕께 올렸다. 1907년(융희1)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報償會長)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이주개척지의 한교(韓僑)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1919년에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청원문 초안의 작성을 담당하고 여기에 유림대표 137명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이들과 만나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연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타협하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몰려오자, 시장에 모여있던 유림들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가 3천명을 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을 연행하여 시위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겁을 먹은 경찰들이 발포하여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내로 피신시키고 대구로부터 15명의 수비병을 증원받았다.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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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헌 집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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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헌 사당(숭의재)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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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헌 묘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