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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추모비, 흉상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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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길 사적비
김상길(1854 - 1927)은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정월 29일 청송지역 유생들이 거의를 결정한 후 심성지(沈誠之)를 대장(大將)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熙)를 우익장(右翊將),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김상길은 우익장에 임명되었고,「唱誓詞」를 지었다. 그 후 청송의진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참모(參謀)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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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집 기념비
배연집(1878 - 1953)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갔다. 배연집은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이때 정용기(鄭鏞基)가 귀향하여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의진 구성을 진척시켜 가고 있었다. 정용기는 시종관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종사하고 있던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의 아들로서 부친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아들을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하고 부친은 서울에서 지원하기로 약속 받은 때문이다.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영남 일대의 크고 작은 모든 고을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대규모의 의진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천·신녕·흥해·청하·기계·죽장·영덕·영해·영일·장기·진보·청송·영양·봉화·예안·안동·비안 등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배연집은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박태종(朴泰宗)과 함께 비안(比安)·의성(宜城) 일대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소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곧 배연집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여 무장시키고 정용기의 의진에 달려갔다.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깃발을 높이 들고 영천을 떠나 영해로 진출하여 신돌석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그후 청하(淸河)로 진격하던 중 적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배연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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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약서당(현 부강서당)
당약서당(현 부강서당)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설 교육기관이다. 부강서당(鳧江書堂)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유치명 유치명(柳致明)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병신창의(丙申倡義) 청송 의병의 선열을 추모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청송지역 의병 83위 위패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2011년에 개관된 항일의병기념공원 내 충의사(忠義祠)로 청송 의병 선열의 위패가 이안(移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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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병용사 충혼탑
무명의병용사 충혼탑은 이름을 알지 못한 채 희생된 전국의 무명 의병 용사의 우국충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들은 을미사변 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국가 부흥을 위한 의병투쟁에서 항일의병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의병항쟁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를 회고하면 겨레가 외침을 받아 위치게 처했을 때 분연히 나라를 지키고 우리 민족 주체성을 선양한 것은 집권세력이 아니라 의롭고 용기 있는 백의민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외침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웠던 의병이 있었다. 의병은 근본정신은 겨레가 외침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굳은 의지이다. 그 정신을 거슬러 올라가면 몽고가 침임했을 때 목숨을 바쳐 대항했던 삼별초항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시기의 의병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민족 자존을 위한 항쟁으로 1910년 국권 피탈 전후의 의병전쟁에 영향을 준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의병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난의 의병활동과 한말의 을미사변 이후 한일 강제 병합 전후의 의병활동이며, 1895년 10월의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하여 개항 이후 축적되어온 반일감정이 반일 의병투쟁으로 바뀌면서 1910년 국권 피탈 전후의 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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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 항일의병기념관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은 청송의병의 활동 기록 및 의병들의 참뜻과 정신문화를 전하는 공원이다. 전국 최초로 의병 유공 선열로 서훈된 전원의 위패를 한곳에 모시고 있다. 해당 공원 내에 항일의병기념관이 존재한다. 본 기념관은 전국적인 항일의병의 활동상과 함께 청송 지역의 의병 활동상을 알리면서 의병정신을 재조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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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병 화전등 항일격전지 표지석
청송의병이 화전등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 곳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화전등전투는 1896년 7월에 청송의진이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동 마평의 화전등(花田嶝)[꽃밭등]에서 벌인 관군과의 전투를 의미한다. 영덕전투에서 김하락이 전사한 뒤 큰 손상을 입은 이천의진이 1896년 7월 16일 청송으로 들어와 화장동에 진을 치고 있던 중 7월 20일경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청송의진은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청운에서 화장동으로 행군하여 나아가던 중 부동면 상평동 마평의 화전등[꽃밭등]에 이르러 관군의 기습을 받고 교전하였다. 이른바 화전등전투[꽃밭등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청송의진은 6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퇴하고 말았다. 그 후, 화전등전투[꽃밭등전투]에서 패한 청송의진은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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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 마평 4의사 공적비
1896(병신)년 3월 2일(음 1월 19일) 구한말 청일전쟁과 갑오변란을 겪으면서 국운이 쇠하여 역신 부일배들이 국권을 농간하고 을미년에는 국모를 시해하는 기치작폐가 익심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창의할 때 관찰사와 군수가 야간에 도주하여 국위와 향읍의 존망이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였다. 부사면의 백여향원과 시정민인이 함집하여 서효원 공을 대장으로 추대하며 창의를 거듭 간청하였다. 삼일야를 지새면서 효유통문을 각 면에 발송하여 거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충과 역으로 경계될 것이며 또한 의를 모르는 짐승과 사람으로 대별될 것이라 천명하여 원만집회를 이루어 청송의진을 창의 고유하고 서효원 공은 의영도지휘사로 서효신 공은 우익장으로 서효격 공은 서기로 서효달 공은 향의로서 창의에 주도적인 역할과 활약한 사실은 위도위국에 진충보국하는 정신으로 그 충의는 독립운동정신의 모태정신이라. 대한민국 건국공로 유공자로 서훈을 추서하니 일문사종의 창의공적과 충혼을 기리고자 후손들의 성력으로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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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마을 표지석(안덕면 감은리), 감은리 전투전적비, 항일의병 13의사 기념비, 청송의병 감은리 항일격전지비
청송은 전국에서 의병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의병사에 있어 정신적인 선각자들의 연고지다.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선생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퇴계의 본향이 청송의 진보(眞寶)이고,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임란 초에 퇴계(退溪), 남명(南冥) 두 선생의 후학을 의병으로 동원하여 진주성을 사수한 학봉의 태지향이 청송의 안덕이요, 의병승장 이었던 사명대사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하였다. 이러한 토양위에서 청송의 선비는 평시에는 수신제가 하다가 나라가 부르면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 있으면서 고을을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때는 모름지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충의보국의 일념으로 힘이 다할때까지 처절하게 항전하였다. 1. 의병마을 표지석(안덕면 감은리) 1896년 3월 12일(음 정월 29일)에 창의한 청송의병(靑松義兵)은 5월 13일에 이르러 의성·이천의병과 연합의병을 결성하였다. 연합의병은 5월 14일 감은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의병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감은리에서 승리를 거둔 연합의병의 성과를 길이 전하기 위해 본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2. 감은리 전투전적비 감은리전투란 연합의병이 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1896년 3월 12일(음 정월 29일)에 창의한 청송의병(靑松義兵)은 5월 13일에 이르러 의성·이천의병과 연합의병을 결성하였다. 연합의병은 5월 14일 감은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의병은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청송의병 창의 120주년을 기념하여 (사)의병정신 선양 청송지회의 발의에 의해 본 비를 건립하여 감은리 전투에 참전한 의진 의병선열들의 호국정신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을 길이 기념하고자 하였다. 3. 항일의병 13의사 기념비 구한말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으로 시작된 항일의병은 왜적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때마다 일어났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이었고 지도자는 전직관료나 유학자였다. 이들은 향토지리에 밝아 지역 조건에 맞는 무기, 매복, 기습, 위장 등 유격전술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왜적과 싸우고 무찔렀다. 1896년 5월 14일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청송, 의성, 이천 의병부대 240명과 감은리 주민들이 뭉쳐 이 곳 산야에서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왜군들과 싸워 이긴 항일승전 감은리 전투를 적원일기에서는 상세히 밝혔다. 당시 패배에 격분한 왜군들이 분풀이로 감은리 마을을 방화로 전소시켰으며 북진을 중지하고 퇴각하였다. 이때 순국한 13인의 애국지사의 애국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길이 전하고자 본 비가 건립되었다. 4. 청송의병 감은리 항일격전지비 청송의병 감은리 항일격전지비는 1896년 4월 2일 청송의병이 친일 적군과 대치하여 7-8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격퇴시켜 승리를 거둔 전투를 기념하는 사적이다. 그러나 퇴각하던 적군이 앙갚음하고자 온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등, 그 형언할 수 없는 참상과 더불어 숭고한 청송의병 지사들의 정신을 다시금 상기하고 전하고자 이곳 항일 격전지에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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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국 기념비
조병국(1883 - 1955)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27일의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간절히 소망하던 차에,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으로부터 격문을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화목 장터에서 조현욱·신태휴(申泰烋)등과 함께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이때의 화목 경찰주재소에서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인물 2명을 체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다시 말을 타고 수십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연도에 있던 군중이 시위대열에 함세하여 군중은 6백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청송경찰서에서 조선인 경부(警部)와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같은 민족으로서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는 매국노를 죽이라고 외치며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4명이 부상당한 채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5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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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병 전적기념비
1896년 병신 정월 16일 이곳 청송에서도 조성길이 격문을 띄어 향유와 유명무명의 의사 200여인이 참집하여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창의하였다. 설단입기한 후 수삭에 대구에서 공격해온 적병을 격퇴하고자 행군중 신성에서 분진 심대장은 향근곡하고 조성길을 각군 도지휘로 정진수 장한탁 김진방 장한두 남석우 조성일 남석술 조찬규 남석인외 다수장병이 이곳 안덕후산에 유진하니 4월 상순일이었다. 감은후산에 포진한 적병을 의군은 옥현에서 공격하니 종일토록 일진일퇴의 격전이 전개되었다. 세불리한 적병이 전화로 불타는 감은의 잔여민가에 방화하여 한 마을 백여호가 소진되었고 파아의 사상자도 무수하였다. 이때 왜추는 "임진시에도 청송은 불가침이라 하더니 과연 난공불락의 곳이다."하고 야반에 의성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서전에 대승한 청송의병은 사기충천하여 조성길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덕으로 출병하여 흥해입성 합진하니 대구와 경주의 적병이 합세하여 맹공하므로 격전끝에 철군하니 타군 산병 수백명이 청송의병과 생사혈맹하고 청송으로 회군하였다. 기후 선유사 조유승의 자중 권유에도 불응하고 이천진이 화장에서 위급하므로 원군차 행군하다가 마평 동방에서 백병전을 전개하였으나 세궁력진하여 패하고 산병을 규합하여 경주 인부에 이르러 다시 적의 대군과 대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선열들의 의롭게 뿌려진 피는 거룩한 의기로 살아 움터서 우리의 혈맥속에 약동하고 자주민족의 자유 평화의 정당한 삶을 이 터전위에 영원히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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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 종가재실
허훈(1836 - 1907)은 경북 선산(善山) 사람이다.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맏형이다. 1895년 아우 허위가 거의(擧義)할 때 토지 3천여 두락(斗落)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에는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