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3.1독립만세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
일제의 수탈과 핍박이 날로 잔혹해지던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의성 3.1운동은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의거로 시작되었는데, 안평·봉양·점곡·신평·가음·춘산면 등지로 확산되면서 4월초까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3월 12일 의거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일본 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해산되었고, 주도했던 학생은 붙잡혔다. 보통학교 학생의거의 영향으로 3월 13일과 16일에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金石根)·임재호(林在虎) 등의 주동으로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15·17·18·19일의 독립만세까지 이어졌다. 한편,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이양준(李良俊)이 3월 19일 도리원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군중의 수는 수천 명이었다. 점곡면에서는 16·18·19·20일에 걸쳐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에,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25일에 각각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본 탑이 위치한 곳이 경상북도에서 최초로 기미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이를 알리고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본 탑이 건립되었다
-
박석홍 기념비
박석홍(1896 - 1985)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0년 중국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山市)에서 신민부(新民府)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의 논설위원으로 배일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활동에 진력하였고, 1925년 아성(阿城)에서 김 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血靑年)을 발간하여 혁명적 국권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그 투쟁방법을 선전하였으며,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살해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927년 1월 중국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북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의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동년 9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의 사산(四散)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한 뒤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 20여 회의 예비검속까지 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이필곤 순국기념비
이필곤(1864 - 1909)은 경상북도 의성(義城) 출신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것에 울분을 금치 못하고 1896년 2월 의성지방의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의진에 입대하여 부장(副長)으로 활약하다가 김상종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되었다. 의성군 춘산면(春山面)·왕산면(王山面) 등지에서 왜적과 대적하여 접전하였으나 칙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7년 7월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것이 왜적에게 트집잡혀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어 안동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동년 8월에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우희원 공적비
우희원(1901 - 1978)은 1919년 3월 11일 경북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비안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고 12일 비안공립학교 뒷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우희원은 비안공립학교 학생으로 1919년 3월 9일 경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박만녕(朴萬寧)의 권유를 받아 11일 비안장날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1일 오전 학생 150명을 집합시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오후 장터에 모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다시 12일 오전 전교생을 모아 뒷산에 오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우희원은 체포되어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우용택 숭모비
우용택(1868 - 1940)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안계(安溪)면 교촌(校村)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1904년 2월 러 일전쟁을 도발하여 일본군을 우리나라에 불법 상륙시키고 「제일차 한 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내정간섭을 하며 한국독립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자, 동지 강원형(姜遠馨) 등과 함께 일본군의 불법침략을 규탄하는 공함(公函)을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일제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매국행위에 내세우자 일진회를 규탄하다가 1905년 5월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다. 1905년에 석방된 후에도 정부 내의 친일대신들과 일제에 대한 굴복정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차 올리고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후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김경성 기념비
김경성(1879 - 1943)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경북 김천군(金泉郡) 개영면(開寧面)에서 3·1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10월경 군자금 1,000원을 개인 재산의 처분으로 마련하는 한편 동삼성(東三省)에 이동녕·이시영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동삼성(東三省) 안동현(安東縣)으로 가서 조강제(趙强濟)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안평 항일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조국 광복과 주권 회복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열망이 모여 일제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워 도리원 장터까지 진입한 700여명의 안평인들은 왜군의 무차별 총탄에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 불의에 대항한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민족의 얼을 먼 훗날까지 이어 받기 위해서 1996년 4월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
이양준 순국비
이양준(1890 - 1920)은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과 3월 19일 봉양면 도리원(鳳陽面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3월 8일의 대구(大邱) 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의 귀향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그는 당시 대사동 교회 집사로서 3월 15일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등과 교회에 남아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에는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이튿날에도 오후 8시경,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부락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8일에는 이북술·김유식(金有式)·김도식(金道式)·이만준(李萬俊) 등 3백여명의 시우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 끝까지 시위행진하였고, 이튿날 낮에는 4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인근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미 그는 전날 안평면민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하고, 도옥동 하단(都玉洞河端)에 모이라는 비밀연락을 미리 취했기 때문에 그가 도리원 장터로 시우행진할 때의 시위군중은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인근 비안(比安)주재소에 응원 출동 중이던 군경을 도리주재소에 급파하여, 도리원장이 열릴 무렵 이를 폐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일제의 조치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도리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그도 이때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상처의 악화로 가출옥하였으나, 곧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항일독립운동기념탑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의성에서의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1919년 기미에 서울에서부터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의성의 선열들 또한 3월 12일 비안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오랜 시일 동안 일제에게 항거하여 자주 독립을 분며이 요구하였다. 그 후에도 혹은 국내에서, 혹은 국외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위와 같은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보국의식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고자 본 탑이 건립되었다.
-
병신창의기적비
병신창의기적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하기 위해 1896년 2월부터 4월까지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기념비다.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 초모장에 김수욱, 중군에 권대직, 선봉장에 김수빙, 관향장에 김수협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을미사변을 계기로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담,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출신의 이필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와 옥산의 황산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
박시목 기념비
박시목(1894 - 1944)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2월 동회의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되어 민족정신 고취 내용의 격문 등을 살포하며 활동하였다. 그후 1930년 대구 근교 팔공산(八公山)에서 광선 경영을 위장하여 박영덕·이상훈·심재윤·노석호·김 인 등 애국지사를 규합하였으며, 청년동지들을 연안(延安)으로 밀파하여 독립군(獨立軍)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의 무력항쟁 및 중국의 광복군(光復軍)과 합세하여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등을 계획하던 중 아들 희규를 포함한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아들과 함께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의성의병기념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자, 유림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의성향교도 1896년 3월 17일(음 2.4) 향회를 열어 창의를 결의하고,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마을의 김상종(1848~1908)을 의병장으로 천거하였다. 김상종은 중군장 권대직.선봉장 김수담.우익장 이희정.소모장 김수욱.관향장 김수협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고 3월 25일 의병장에 취임하였다. 의성의진은 창의한 지 8일 만에 치른 구성산(구봉산)전투에서 2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후 벌어진 황산전투.감은리전투.신운천변전투(비봉산전투)에서도 승전과 패전을 거듭하며 분전하였다. 김상종 의병장의 의성의진이 활약했던 전기의병(1894~1896)은 이후 중기의병(1904~1907).후기의병(1907~1910)으로 이어져 항일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의성군은 창의부터 해산까지 62일 동안 결사적으로 항전한 의성의진의 의병투쟁을 널리 알리고, 의롭게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16년 11월, 이곳 사촌마을에 의성의병기념관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