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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집 추모비
구성집(1875 - 1909)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북 봉화군(奉化郡)·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동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皆山洞)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蔚珍郡) 내에서 활동하였고 또 삼척군 죽변동(竹邊洞) 해안에 있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인 조야국송(早野菊松)외 2인을 총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8월 5일부터 10월 10일경 사이에는 울진군 석호리(石湖里) 박명칠(朴明七)과 삼척군의 김자율(金子律)·이도장(李都長)·김자현(金子賢)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그후 1908년 10월 7일 대구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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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직 집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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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직 기념비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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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직 애국시비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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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 기적비
박재화(1890 - 1928)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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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학 기념비
이태학(1890 - 1962)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의성군 운산면(雲山面)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대구에 돌아와서 3월 7일 대구 남산정(南山町)의 예수교 성경학교 강습생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자각심을 고취하였으며 3월 8일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장터로 모여들자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시위하다가 일군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시위가 중지되고 붙잡혔다.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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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수 기념비
권중수(1896 - 1980)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결성한 1910년대의 대표적 국내 혁명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과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부터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18년에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일제의 검거망을 피했던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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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 묘
박재화(1890 - 1928)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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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두 효자비, 효자각
권상두(1870 - 1936)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권상두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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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출 묘
이종출(1890 - 1966)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권상두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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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수 공적비
신두수(1927 - 1986)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개탄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지하결사이다. 신두수는 명성회의 기관지 '새벽'지를 일문(日文)과 국문(國文)으로 간행하여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경주중학교·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등의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는 '새벽'지의 논설주필로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군에 의하여 곧 패망한다는 논조를 펼쳐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명성회는 1944년 11월 조선회복연구단(朝鮮恢復硏究團)과 연합하여 1945년 2월 1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조달과 동지규합에 진력하였다. 신두수는 중경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지령에 따라 밀파한 이회술(李會述)과 안동농림학교 학생 손성한(孫聖漢) 등과 학병징용을 거부하고 돌격대를 조직하여 후방교란 작전으로 일본군 무기고 기습작전 등을 계획하던 중에 3월 초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신두수는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구속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8월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해방후 의성의 봉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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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투사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김원휘·박영화·박영신 등의 주도로 태극기 200여개를 준비하여 주민 2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 시위로 등이 김명출(金明出, 1893~1987), 박세길(朴世吉, 1876~1946), 박영달(朴永達, 1887~1962), 박영신(朴永新, 1891~1942), 박영화(朴永和, 1859~1923), 박인욱(朴寅郁, 1896~1934), 배달근(裵達根, 1865~1944), 배도근(裵道根, 1866~1923), 배용도(裵容度, 1895~1971), 배용석(裵容奭, 1890~1938), 배중엽(裵重曄, 1882~1934), 이일만(李一萬, 1903~1954), 최점문(崔占文, 1874~1938)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밀양박씨 유족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9년 3월 2일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