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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흥부만세탑
본 사적은 건립추진위원회가 울진 흥부장터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1시 울진군 북면 흥부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병항, 남병표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밤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경선 노인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을 꾸짖자 김일수 등이 칠보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개월에서 4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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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장터 기미만세기념비
본 탑은 1919년 4월 13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흥부장날을 기하여 오후 1시 울진군 북면 흥부장터에서 전병항, 남병표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밤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경선 노인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을 꾸짖자 김일수 등이 칠보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월에서 4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위와 같은 독립지사들의 뜻을 널리 전하고자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 8월 15일에 칠보산 현장에 탑과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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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묘
김현규(미상 - 1906)는 경남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6년 9월경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경북 울진군(蔚珍郡)에서 의진을 일으켜 울진 불영사(佛影寺)에 진을 치고 머무르면서 일군을 격파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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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익, 이화익 기념비(금천리)
이목익(1868 - 1949)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1920년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소태리(蘇台里)에서 일제(日帝)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駐在所) 앞과 온천장(溫泉場) 숙소 및 선미리(仙味里), 온천리(溫泉里) 2곳과 평해면(平海面) 평해시장(平海市場)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 금융조합(金融組合)과 왜인고리대금업자(倭人高利貸金業者)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日本物品排斥布告文)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土産物)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1871 - 193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復興)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金光壽)·남병모(南炳貌)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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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익, 이화익 기념비(소태3리)
이목익(1868 - 1949)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1920년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소태리(蘇台里)에서 일제(日帝)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駐在所) 앞과 온천장(溫泉場) 숙소 및 선미리(仙味里), 온천리(溫泉里) 2곳과 평해면(平海面) 평해시장(平海市場)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 금융조합(金融組合)과 왜인고리대금업자(倭人高利貸金業者)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日本物品排斥布告文)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土産物)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1871 - 193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復興)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金光壽)·남병모(南炳貌)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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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수 기념비(읍내리)
주진수(1875 - 1936)는 일찍이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晩興)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민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基地)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1910년 8월에는 김 구(金九)·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 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일명: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안태국·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여하였다. 출옥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 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정의부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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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수 기념비(매화리)
주진수(1875 - 1936)는 일찍이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晩興)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민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基地)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1910년 8월에는 김 구(金九)·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 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일명: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안태국·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여하였다. 출옥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 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정의부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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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영 충의비 제단
남태영(1873 - 1908)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05년 울진군 서면(西面)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장비를 정비하고 1906년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 봉화군(奉化郡) 소천면(小川面)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인 끝에 10여 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봉화에서 권룡하(權龍夏)등과 의병 5백 명을 소모(召募), 역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영양(英陽)·청송(靑松)·영덕(盈德)·풍기(豊基) 등지를 전전하며 활발한 항전을 벌이다가 1907년 일군에게 붙잡혀 이듬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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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기미년 3.1운동이 확산될 무렵 울진 지역에서는 동년 4월 11일 매화장날 500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3일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에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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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배근 공적비
전배근(1876 - 1938)은 1905년 12월 울진(蔚珍)에서 청송(靑松)의 이하현(李夏玄)과 거의(擧義)하고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의 지명을 받은 김형규(金炯奎)가 1906년 6월에 울진(蔚珍)에 오자 의진(義陣)을 재편성하여 불영사(佛影寺)를 근거로 울진(蔚珍)·평해(平海)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신돌석(申乭石) 의병진의 소모장(召募將)으로 1907년 8월 26일 참모 전세호(田世浩), 중군 최경호(崔慶鎬)와 함께 평해군수(平海郡守) 이명근(李明根)을 만나서 대의를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관포군 40명과 군자금 천냥을 받아 울진(蔚珍)으로 돌아와서 장석태(張錫泰)·장진수(張鎭守) 등과 같이 200여명을 인솔하고 울진(蔚珍) 및 평해군 내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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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영 기념비
황만영(1875 - 1939)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成益鉉) 의진(義陣)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沙銅)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露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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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운동 순국열사 기념지비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본 사적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잃고 순국한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