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조재만 묘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백학학원
백학학원은 1921년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다. 이 학원의 설립을 이끈 인물은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조병건이다.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이 힘을 보탰다. 백학학원은 초등 과정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 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로 두기도 했다. 이육사·조재만·이원대·이진영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백학학원은 설립 이후 한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백학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
이범교 추모비
이범교(1888 - 1951)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며 통제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부(交通部)의 교통위원(交通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교통부에서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또한 그 주요 임무로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의식있는 인물을 발굴하여 양성,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그는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뒤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가서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12월에는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시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또한 1921년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이만시를 탈출한 이범석(李範奭)이 약 6개월간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독립운동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진영 집
이진영(1907 - 195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중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원대 집
이원대(1911 -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황보근 추모비
황보근(1882 - 1963)은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이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거의(擧義)하자 입진하여 권규섭(權奎燮)·성낙희(成樂熙)·성낙호(成樂 )·이하수(李河秀)·양석용(梁錫容)과 함께 신녕(新寧) 지방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약관 24세이었으므로 군중 내에서 그를 24장(將)이라 하였다. 그 후 선봉장이 되어 영덕(盈德)·강구(江口)·흥해(興海)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격퇴시키고 포장(砲將)으로 임명되어 맹활약하다가 1907년 9월 입암(立巖) 전투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의병장 정용기는 순국하고, 황보 근은 부상을 입고 귀향하여 치료하던 중 체포당하게 되었다. 그를 체포한 삼목(三木)에게 17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다가 석방된 후 은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진영 추모비
이진영(1907 - 195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중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홍종현, 조병진 추모비
홍종현(1890 -1977)은 경상북도 군위(軍威)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의 영천읍(永川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천 장날인 4월 1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붉은 깃발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12일 오후 3시 30분경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그는 창구동(倉邱洞)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마침 이곳을 순찰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6년 6월 10일의 융희황제(隆熙皇帝)의 국장(國葬)날에는 숭인동(崇仁洞) 83번지의 노상에서 혈서를 쓰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병진(1891 - 196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영천군 영천읍(永川邑)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장꾼 1,00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8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태 90도를 받고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재복 추모비
조재복(1897 - 1952)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영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조재복은 경북 영천군(永川郡) 지곡면(知谷面)에서 목면지(木綿紙)에 '대한독립만세 군위(軍威) 양곡(良谷) 홍종현(洪鍾顯)'이라고 써 보냈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1919년 3월에서 4월로 접어들면서 독립 만세시위는 경북 영천군에서도 더욱 발전되어 갔다. 이때 영천군 신촌면(新村面) 입석동(立石洞)에 사는 홍종현은 4월 12일 장날에, 영천군 영천면(永川面) 창구동(倉邱洞)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다 검거되었다. 홍종현은 그 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다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시위의 전날인 4월 11일 조재복은 홍종현이 당시 체재 중이던 지곡면 오산동(梧山洞) 조주생(曺周生)의 집에서, 홍종현의 의뢰로 목면지에 '대한독립만세 군위 양곡 홍종현'이라고 써주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조재복은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고 5월 11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원대 묘
이원대(1911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병진 묘
조병진(1891 - 1961)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홍종현(洪鍾顯)·조재복(曺在福)·조주환(曺周煥) 등과 함께 영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붉은 깃발과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4월 12일 영천 장날 조병진은 동지들과 함께 장터로 나아가 1천여 명의 장꾼이 모여들자 당시 창구동 소재 영천공립보통학교 앞에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5월 8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태(笞) 90대를 받고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지역의 후학들에게 독립 사상을 주입하는 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이원대 추모비
이원대(1911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