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대장교회(3.1운동참여교회)
대장교회는 익산군(현, 익산시) 춘포면에서 1902년에 시작되어 최순표와 최재연이 모여 예배를 드리다 1905년에 예배당을 세웠다. 예배당이 세워진 춘포면은 호남평야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미곡 창고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대장교회는 민족의식이 강한 교회로 예배당에 노동야학을 열고 지역 주민들에게 조선어 강습을 실시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1919년 4월 4일 솜리 구시장에서 열린 만세 운동 당시 판문교회(대장교회) 교인 박도현은 남전교회관련항목 보기 문용기와 함께 4월 4일 만세 운동을 이끌다 순국하여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3.1운동 참여교회임을 공인하고 현판을 수여했다.
-
유창석 묘
유창석은 1919년 3월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사흘간 돌마면과 낙생면 면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돌마면 군중들은 거사 당일인 27일 오전 10시경, 분당리 장터에 모여서 한백봉(韓百鳳)·한순희(韓順會) 등의 주도하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게 외치며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하였다. 유창석은 이들과 협의하여 지도자급으로서 역할을 확실히 하여 마을 주민들을 독려했다. 면내의 여러 곳을 순회하다가 오후에는 낙생면 판교리에 진출하여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였다. 낙생면 면민들도 돌마면 시위군중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시위를 선도한 남태희(南泰熙)는 돌마면 시위를 주도한 한백봉·한순희 등의 권유를 받고 낙생면 면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그 결과 돌마면 군중들은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여 면소재지인 판교리에 집결하였고, 인근 백현리·운중리·궁내리 주민들까지 시위에 합세하게 되면서 그 수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판교리는 면소재지이자, 7명의 헌병이 소속된 헌병주재소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시위 군중들의 숫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탓인지 헌병들과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일 저녁 무렵까지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계속하다가 해산하였다.
-
제석교회(3.1운동참여교회)
1906년 설립된 제석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익산 지역의 3.1운동을 이끈 민족교회이다. 1908년 홍종필이 기증한 곱패집은 ㄱ자 모양으로 남녀가 분리되어 예배를 드린 초기 한국교회 중 하나이다. 1909년 홍종익과 홍종필은 부용학교를 세워 100명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이들은 군산선교부가 운영하는 군산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제석교회는 1919년 3월 10일 웅포, 함라, 함열, 용안, 강경 일대의 만세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제석교회가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강경 3.1운동 시 제석교회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엄중칠은 강경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형오는 함라·웅포 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엄창섭은 강경 장날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제석교회 출신들이 3.1운동을 주도한 후 일본 경찰은 종탑을 부수고 교회종을 빼앗고, 성경을 불태웠으며, 부용학교를 강제 폐쇄하고 일본 소학교로 강제 수용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제석교회를 남전교회와 함께 ‘익산 지역 3.1운동 사적지’[한국기독교사적 제19호]로 지정하였다.
-
남전교회(3.1운동참여교회)
남전교회는 1897년 10월 15일에 설립된, 익산지역 최초의 교회다. 1900년 2월 21일[남전교회 당회록] 이윤국의 집을 ‘남차문교회’라고 부르면서 독자적인 예배 처소를 갖게 되었으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전킨(William M. Junkin)이 담임 선교사였다. 남전교회는 남학교인 도남학교(道南學校)를 1910년에, 여학교인 미성학교(美聖學校)를 1922년에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23년에 남녀공학인 신성학교(新聖學校)로 통합하여 1942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될 때까지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익산의 3.1운동인 솔내 4.4 만세운동은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만세 운동이었다. 만세 운동 전날에는 남전교회 교인들이 대형 깃발과 현수막,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남전교회 교인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이 순국하였다.
-
여올교회(3.1운동참여교회)
여올교회는 호남 지역에 온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현지인을 통해 1903년에 교회가 설립 되었다. 정확한 설립 시기, 명칭, 설립자는 알 수 없지만 적상면 괴목리에 개척된 한 교회가 1903년에 새내라고 하는 동네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늘갓(지금의 여원리)에 살던 전찬중과 한윤성이 이 교회를 다녔는데, 늘갓에 교인이 늘어나자 1906년에 늘갓의 전찬중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늘갓 교회, 즉 현재의 여올교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10년 마을 뒷동산 중턱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첫 헌당식을 하였다. 3·1 운동 전해인 1918년에는 늘갓 교회에 세운 삼숭 학교를 통해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삼숭 학교에는 무주뿐만 아니라 진안, 금산, 장수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학문을 배우고자 몰려들어 전성기 때는 8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3월 1일의 만세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전일봉(全日奉) 장로가 4월 1일 무주 장날 새벽에 나뭇짐을 실은 달구지와 장짐에 태극기를 숨겨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읍내 장터로 진입하여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7회에 걸쳐 3,500여 명이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전일봉 장로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에도 꾸준히 전도 활동과 애국 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지금도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4월 1일이 되면 무주 장에서 만세 운동 기념식을 하고 있다.
-
군산지곡교회(3.1운동참여교회)
군산지곡교회는 1907년에 창립되어 1915년에 지곡동 290-2에 교회를 건립하였다. 군산지곡교회는 민족 구국 운동인 3·1 운동에 함께 한 교회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 횃불은 군산에까지 타올랐다. 군산 만세 사건을 주도한 것은 영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이때 영명 학교 학생이었던 지곡 교회 소속 전세종 학생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지곡 교회 소속 고창록 학생 역시 군산 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했다. 지곡 교회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내던지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밝히 드러냈던 선배들이 존재했다.
-
3.1운동기념비(장수군)
장수군 3.1운동기념공원은 2021년 3월 1일 조성되었는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공헌한 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기념공원 내부에 3.1운동기념비가 있는데, 기념비를 중심으로 양옆에 장수군의 독립운동가들의 성함이 적혀있는 조형물이 있다. 장수군은 3.1 독립선언의 33인 민족대표 백용성과 문태수, 전해산, 박춘실, 김동신 의병장 등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희생하신 순국선열을 배출한 지역이다. 장수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5일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년 3월 19일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다.
-
3.1운동기념비(산서)
장수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5일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 장날 박정주·안성섭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사계리에서 주민 20여명이 사계산 시위를 벌이고, 양일표·빈영섭·유동렬 등의 준비로 3월 26일 산서면 오성리에서 주민 수백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들 시위로 김형택, 박기영, 박정주, 빈영섭, 신동개, 안성섭, 양일표, 유동렬, 이길선, 이상욱, 이화백, 장재만, 정호현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일제강점기 수탈현장 안내판
화호리는 숙구지라고 불리었던 곳이며, 광활한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지배층의 착취와 일제강점기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다. 화호리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식산은행에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아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로 땅을 사들이거나 고리대금업을 통해 농토를 빼앗아 조선의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하였다. 생존문제에 봉착해야 했던 식민지 조선의 농민들은 식민지 거대지주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식민지적 사회구조가 고착되어 갔고, 식민지 조선 경제에서 수탈이 주요한 하나의 측면을 이루고 있었으며, 수탈은 생산수단이 일본인에게 집중되고, 산출되는 이익 또한 일본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
김택술 배향사원 창동서원
창동서원은 후창 김택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1965년 지역 유림들이 세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서원 내부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와 강당, 직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후창집의 사본과 석판본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다. 김택술(1884-1954)의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이며, 일제의 통치를 거부해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후학 교육에 힘쓴 유학자이다. 17세 때 천안 금곡에 있는 전우(田愚)를 찾아가 수학하여 후창이란 호를 받았다. 1906년 최익현(崔益絃)의 태인(泰仁) 창의(倡義)에 참가했으며, 송병선(宋秉璿)·김복한(金福漢)과도 사귀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효로서 이름을 알렸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 꾸짖으며 물리침)했고, 또 큰 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하였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공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배향하였다.
-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세종시 연기면 연남초등학교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5단의 기단 위에 놓여져있으며, 운동장 가장자리에 위치해있다. 증언에 따르면, 본 비는 원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진 비석이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독립기념비로 새롭게 새겨 재활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돌이라는 것이 중요한 재산이나 자원이었고,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새겨진 글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
고석주 흉상
고석주(1867-미상)은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옥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한인 단체인 자강회, 협성회, 국민회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 고취와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보, 합성신보, 신한민보 등의 언론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Korean Day School의 한문교사와 한인중앙학교 교사로서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6년 6월 귀국하여 영명학교 교사로 있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 선언서가 동료 교원에게 전해지면서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군산(群山) 장날인 3월 6일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계획 추진하였다. 계획이 발각되어 3월 5일에 거행하였으며, 50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독립 선언서 2,000여 장이 발견됨에 따라 고석주는 송정헌(宋正憲)·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