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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집(조지훈 처가)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양선 김성규(1904~1946)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김성규는 무섬마을의 문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는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홍수로 인해 김성규 가옥이 유실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 가옥마저 잦은 수해와 퐁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 터로 남아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사업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김성규 옛 가옥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 본관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김화진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에 힘쓰는 한편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총무간사와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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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집(해우당)
김화진(1904 - 1946)은 1922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4년 5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고무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1928년 2월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귀향 다음 날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 가입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청년동맹 결성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합쳐져 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김화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9년 김화진은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김계등(金季登)[1907~?]과 함께 순흥청년회 해체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주청년동맹 창립 이후 순흥 등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산되어야 할 순흥청년회가 해산하지 않고 영주청년동맹의 활동 방침과 다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화진은 김계등과 순흥청년회 총무 차병섭(車秉燮)을 만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 9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김화진은 1929년 1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 30일 열린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영주 지역에서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구제연설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김화진은 서대(西隊)에 편성되어 영주군 풍기면와 순흥면을 맡았다. 1929년 6월 신간회 영주지회가 영주 읍내에서 과자 행상을 통해 운영비를 마련할 때, 평은면과 문수면을 대상으로 한 제3대에 편성되었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될 때 김화진은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영주농민조합은 금계와 이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일 농민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면서 2,352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김화진은 1931년 9월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계등·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과 함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김화진은 김계등·김준상(金俊相)[1910~?]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조직을 맡았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으로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화진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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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서숙
아도서숙은 일제 강점기에 무섬마을 주민들이 계몽 활동과 항일 운동을 벌인 근거지였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1928년 10월, 이 지역 항일운동 지도자인 김화진 선생의 주도로 무섬마을 청년들이 대중의 모임 장소인 공회당을 세우고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아도서숙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아도서숙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봉건적·억압적이었지만 파격적으로 열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었고, 학급 편성은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주로 민족 교육과 문맹 퇴치 및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을 실시했으며,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만들면서도 수업에 참여해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학생들의 단결심 고양과 체력 향상을 위해 강변 백사장에서 축구 같은 운동도 자주 즐기도록 했다.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철에는 제한 없이 학생을 수용하였다. 아도서숙은 9명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이 같은 교육 체제를 유지했다. 운영위원이었던 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종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 등은 모두 영주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시로 체포되어 구류·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또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 의거가 있을 때에는 무섬마을의 부녀자들이 아도서숙의 호롱불 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하여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다. 온갖 탄압에도 무섬마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1933년 7월,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5년 만에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이 지역 항일운동의 특징적 역사를 잘 말해 주는 뜻깊은 장소이다. 현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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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묘
김용준(1873 - 1932)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에서 열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이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이 커지고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신들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장소는 인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풍기장터로 정하였으며, 1919년 4월 9일 장날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용준은 이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안용호 등이 주도하는 만세시위운동에 나가 참여하였다. 김용준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때 순찰 중이던 풍기주재소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안용호·최성원·남영진 3인을 주동자로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김용준은 이 모습을 보고 시위 군중 50여 명을 선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입구 동남쪽으로 행진해 갔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안용호 등을 붙잡아 간 일본군 헌병과 수비병들이 다시 달려 나왔다. 이때 김용준은 같은 마을의 황정흠(黃鼎欽)[1889~1955]·황정흠(黃政欽)[1881~1949]·남상필(南相弼)[1891~1972]·이화백(李和伯)[1884~1968]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용준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고 풀려났다. 199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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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묘
김동진(1867 - 1952)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가 독립군자금의 모집과 국내외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루·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장석영(張錫英)[1851~1929]·김창숙 등이 추진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독립청원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체포될 때 서명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간 투옥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고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에 김동진은 아들을 군자금 모집에 참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1926년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약 1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1952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동진의 문집으로 12권 7책의 『정산집(貞山集)』이 전한다. 김동진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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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강학당(도강서당)
도강서당(道岡書堂)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동진이 후진 양성을 위해 1900년경에 건립한 사당이다. 김동진(1867 - 1952)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가 독립군자금의 모집과 국내외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루·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장석영(張錫英)[1851~1929]·김창숙 등이 추진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독립청원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체포될 때 서명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간 투옥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고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에 김동진은 아들을 군자금 모집에 참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1926년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약 1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1952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동진의 문집으로 12권 7책의 『정산집(貞山集)』이 전한다. 김동진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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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환 추모비
최봉환(1895 - 1937)은 영주에서 만주 장백현 14도구로 이주하였다. 1918년경 14도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대한광복단에 군자금은 물론 포목 상점의 취급 품목인 의류 등을 제공하였다. 대한광복단은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본부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의 지휘 아래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가 부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뒤에는 김좌진(金佐鎭)[1889~1929]이 파견되었다. 12월에는 우재룡(禹在龍)[1884~1955]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1878~1936] 등과 만주 본부의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잡화상 대동상점(大同商店)이 대한광복단의 거점이자 자금 창구의 역할을 하였듯이, 최봉환의 포목상도 만주 장백현과 관련된 대한광복단원의 비밀 모임 장소와 단원들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23년 8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체포되었다. 최봉환은 국내로 호송되어 1924년 12월 9일 함흥지방법원 북청지청에서 1919년 제령 7호 「공갈·가택침입·방화미수·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봉환은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고초를 겪다가 1937년 7월 6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봉환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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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기념비
해당 비석은 1906년 사립흥주소학교로 설립된 이후 1944년 9월부터 45년 4월에 걸쳐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비석은 이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이다. 일본 식민지 통치 말기에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을 교육이 아닌 전쟁 물자 생산 및 수집을 위한 노역에 동원했고, 이를 강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분개한 이석한 등 6학년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동맹 휴학으로 일본 식민지 통치에 맞섰다. 일본인 교사들은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하였지만, 학생들은 이에 굽히지 않았다. 한편 1945년 4월에는 4학년이던 김낙순이 일본인 교장에 맞서 일본제국주의 교육의 그릇됨을 낱낱이 비판하여 그들의 잘못을 참회토록 하였다. 이에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06년 이를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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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영 수학터(삼수당)
이교영(1873 - 1911)은 대한제국기 경상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7년에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고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등 일제의 각종 침략조약에 반대하였고, 일제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경상북도 일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는데 1909년 3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순흥군(順興郡) 소천리, 풍기군(豊基郡) 외면 신항리, 고교리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 헌병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이교영은 친일 한인에 대한 응징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예천군 미울리의 일진회원 홍갈산(洪葛山)을 총살로 처단하고, 안동군 하암탑리에서도 성명 미상의 한인 밀정을 처단하였다. 군자금 모금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안동, 영천일대로부터 군자금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교영은 일본군과의 교전, 친일 한인처단, 장기 항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 등 다각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일제 고등법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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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구 순절비
이현구(1862 - 1940)는 어린 시절 큰형 이선구(李善求)(1856 - 1922)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이 무렵 안동 일대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이 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예안통문이 돌면서, 1896년 1월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는데, 대장은 이만도(李晩燾)[1842~1910], 부장은 이중린(李中麟)[1838~1917], 선봉장은 이인화(李仁和)[1858~1929]가 맡았다. 이때 이현구도 서기를 맡은 이선구와 함께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현구는 1899년 풍기군 봉현면 이전리(泥田里)[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한동안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0년 9월 이만도가 단식 끝에 순절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죄인을 자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1934년 영주군 안정면 생현리로 이주한 후, 안상봉(安相鳳)·황영래(黃永來)[1897~1922]·김동진(金東鎭)[1867~1952]·황영조(黃永祖) 등 영주 지역 유생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단식·순국하였다. 이현구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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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흠 묘
김순흠(1840 - 1908)의 자는 치화, 호는 죽포이며, 개항기 을미사변 후 이강년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했다.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허위(許蔿)·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 살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듣자 비분하여 경학원(經學院)의 강사를 거절하고, “일제의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감행,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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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위령비
순국위령비는 영주시 영주2동 438에 위치한 구성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공원 내에는 순국위령비 외에도 문화재 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반구정을 비롯하여 가학루, 춘수당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나라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고장을 지키시다가 훌륭한 자취를 남기고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순국위령비를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