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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지(보광학교)
신간회 안동지회가 창립된 보광학교(普光學校)가 있던 곳이다. 1927년 2월 좌.우를 아우른 신간회(新幹會)가 탄생하였다. 신간회는 전국에 150여 개 지회를 가진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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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3.1운동 모의장소(안동교회 터)
안동교회는 1919년 안동 3.1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교인들은 만세시위 날짜를 13일로 잡았으나, 주도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인들은 다시 3월 18일로 날짜를 잡고 태극기와 격분을 만들었다. 낮 12시가 되자 수십 명 교인들이 안동시장으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림도 참가하여 2,500명이 넘었으며, 다음날 새벽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안동교회 교인 8명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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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백 기념비
조춘백(1893 - 1922)은 1919년 3월 13일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3월 18일 안동 시장 일대에서는 수 차례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4~5시경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등 수천 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외쳤다. 3월 20일 안동경찰서 유치장(留置場)과 구내에서 2차례에 걸쳐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월 23일에는 저녁에 읍내 부근 각처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군경은 자위단(自衛團)까지 동원하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10여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천동(泥川洞)의 조춘백은 3월 23일 오후 10시 목성동(木城東) 서문(西門) 다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안동경찰서(安東警察署)로 끌려갔다가 안동 검사분국(檢事分局)으로 송치되었다. 3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검사분국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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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형 순국기념비
최주형(1876 - 1908)은 신돌석(申乭石) 의진에 참여하여 영솔장(領率將)으로 경북 울진·청송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최주형은 1906년 신돌석 의진에 참여하여 영솔장(領率將)으로 활약하였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1906년 3월 13일(음)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丑山)에서 약 300여 명의 병력으로 거의하였다. 이후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 울진읍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가시켜 3,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최주형은 신돌석 의병부대의 영솔장으로 1906년 울진 장호관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고 일본 함선 9척을 격침시키는 등 전과를 올렸다. 1907년에는 울진 매화리와 청송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등 강력한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 26일 평해(平海) 병곡면(柄谷面) 아곡전투(牙谷戰鬪)에서 왜병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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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석 순국기념비
신운석(1839 - 1896)의 자는 응천(應天), 호는 청헌(淸軒)이며,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의병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유리한 기세를 잡은 일본군이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11월에는 개화라는 명분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게 하는 등 노골적인 침략 책동을 드러냈다. 따라서 전국 유생들은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수호하고자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비롯하여 청송(靑松)·영양(英陽)은 물론 영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3월 지품면(知品面) 출신 김건(金健)이 창의장이 되어 영덕의진을 일으켰으나 곧 물러나고, 신운석이 뒤를 이어 의진을 이끌었다. 영덕의진은 3월 11일 영덕군 남정면 부경동(阜境洞)에 진을 치고 매복하였다가 3월 13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물러나 영덕읍 남천쑤[남천 숲]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신운석은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대하여 불굴의 기상으로 격퇴하면서 전세가 일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신운석은 5월 24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남하한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에 합세하였다. 6월 4일 영덕 오십천의 남천쑤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남천쑤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신운석은 지품면 신양동(新陽洞)으로 진을 옮겼다가, 6월 20일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지품면 율곡리(栗谷里)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삼종질 신태홍(申泰洪)이 신운석으로 오인되어 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있었다. 신운석은 자신 때문에 고생한 집안 조카를 생각하여 스스로 관군에 출두하여 자신이 의병장임을 밝히고 신태홍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청심분파소에서 문초를 받자 혀를 깨물고 불응하다가 1896년 8월 초3일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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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도해단, 도해비, 도해진
김도현(1852 - 1914)의 자는 명옥, 호는 벽산이며, 이명은 한자가 다른 김도현(金燾鉉)이고,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주4하였다. 이 무렵 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하였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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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호 기념비
이겸호(1895 - 1942)의 이칭은 석이며,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노력하였다. 1918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군자금모금을 위해 귀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1소대원 이덕숙(李德淑)·신형섭(申亨燮) 등과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5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상촌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붙잡혀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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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3.18만세운동기념탑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기념탑.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이 영덕면 금호동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인 강우근과 권태원은 영덕면 장날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고 영덕면 화개동,금호동,남정면 남정동의 기독교인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반, 영덕시장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003년 12월 30일, 영덕 애향동지회에서는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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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주재소 3.1운동만세시위지
1919년 3월 영해면 주민들이 영해주재소를 공격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영해면 주민들은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는데, 영해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1시경 영해주재소로 옮겨 전개되었다. 3,000여 명의 주민들은 영해주재소로 몰려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펼쳤다. 주민들은 영해주재소에서 일제 경찰을 감금하고 집기와 기물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19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영해주재소 앞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경북지역에서 일어난 격렬한 3.1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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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3.1의거탑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기념탑.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이 영덕면 금호동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인 강우근과 권태원은 영덕면 장날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고 영덕면 화개동,금호동,남정면 남정동의 기독교인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반, 영덕시장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003년 12월 30일, 영덕 애향동지회에서는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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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만세운동 발상지 기념비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기념탑.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중에 이 영덕면 금호동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인 강우근과 권태원은 영덕면 장날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고 영덕면 화개동,금호동,남정면 남정동의 기독교인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반, 영덕시장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003년 12월 30일, 영덕 애향동지회에서는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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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설 묘
이현설(1894 - 1952)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 시위와 병곡면 읍내 시위 소식을 접한 후, 다음날 창수 경찰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신리에는 도로공사로 전답을 강제 수용당하여 일제에 불평을 가진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동참하였다. 3월 19일 이현설(李鉉卨)은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창수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오후 4시경, 주재소 앞에는 인근 마을 주민까지 약 2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를 점거한 후, 청사(廳舍) · 객사(客舍) 및 기숙사 등을 파괴하고 공문서를 훼기(毁棄)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치된 대검, 총, 기타 집기까지 완전히 파괴하였다. 저녁 7시까지 시위를 계속한 후 군중들과 함께 귀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損壞),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2년 5월 24일 사망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