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기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기는 암울했던 일제로부터 오늘의 풍요를 안겨준 광복인사들의 잊혀져간 행적을 후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 안에는 선열의 충혼을 담은 오미광복운동기념탑과 연계정이라 편액한 육각 정자를 건립하고 경내에 절의에 찬 문정공 장암 김선생 신도비를 건립되어 있다. 훌륭한 선열들의 영광된 모습을 만세에 기리고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산 교육의 장을 삼아 미래를 도모하도록 했다.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오늘의 풍요를 가져다 준 광복인사들의 애국행적을 기리고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2008년 10월 11일 조성하였다. 2003년 마을 동산인 북경재 공원화 발의를 시작으로 풍산 김씨 오미동 문중회의에서 공원화를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결성, 후손들의 성금과 안동시 보훈청의 지원을 받아 오미광복운동기념탑과 풍산 김씨 선조들의 행적을 기린 신도비, 6각 정자 ‘연계정(蓮桂亭)’을 건립하였다.
-
풍산소작인회 활동지 표지석
풍인소작인회는 192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조직된 소작인단체이다. 192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조직된 소작인단체이며, 1923년 11월권오설(權五卨)·이용만(李用萬)·이회승(李會昇) 등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조직으로는 총회에서 선출된 2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있고, 이들이 호선하여 9인으로 이루어진 상무집행위원회가 있었다. 상무집행위원들은 서무부·재무부·조사부 등 3개부로 나뉘어 회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회에는 소작인만이 아니라 지식인·자작농, 그리고 중소지주까지도 참여하였다. 소작인회는 회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소작쟁의를 벌여 소작료 감하와 소작권 안정을 주장하였다. 1924년 봄 총회를 열고 춘계작물 소작료를 2할로 감해줄 것을 지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했으며,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커녕 같은 해 6월 소작인의 소작권마저 박탈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도 지주들이 소작인회 회원들의 소작지를 박탈해 소작회원이 아닌 농민에게로 소작권을 이전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같은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의 권리보호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소작인회 간부 및 소작인들이 구속되어 복역하거나 벌금형을 받기도 하였다. 소작인회는 소작쟁의만이 아니라 봉건적 신분질서철폐운동을 동시에 벌이기도 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소작료를 늦게 납부했다고 소작인을 매를 때린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안동의 모든 사회단체와 연계해 서원철폐운동으로까지 진전되었다. 당시까지도 향촌사회에 관념적으로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6년 조선공산당 안동군조직의 세포조직이 소작인회 내부에서 성립되면서 소작인회는 사회주의운동 변화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0년 초 간부들이 조선공산당 지방조직 관계로 붙잡히면서 소작인회는 지하조직화하였다.
-
권오설 묘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권준희, 권오상 집
권준희(1849 - 1936)는 1849년 9월 1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 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계상(啓象), 호는 우암(友巖)이다. 조선 후기 학자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현손이다. 생부는 권찬(權鑽)이고, 백부 권익(權翼)에게 출계하여 수곡(樹谷) 권보(權甫)의 종손이 되었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심경』·『근사록』등을 탐독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손자 권오돈(權五敦)·권오운(權五雲)·권오헌(權五憲)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가 결합하여 1915년 7월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이에 류시만(柳時萬)·권준흥(權準興)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월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해 채기중(蔡基中)·임세규(林世圭) 등 주요 인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71세로 대한광복회 회원 중 가장 고령이었다.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다 1918년 5월 3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권오돈(1900 - 1928)의 자는 전현, 이칭은 권오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권오상은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이던 1924년 화요계 청년운동 단체인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 운동을 추진하자 권오상은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권오상이 이끄는 학생 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계획대로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國葬日)에 권오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오상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권오설, 권오직 집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권오설 기적비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현섭 집, 순국지
이현섭(1844 - 1910)의 자는 서규, 호는 우헌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자결한 열사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신간회 안동지회 독립운동 본거지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유창우 묘
유창우(1884 - 1921)는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이향(李香)을 통해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만나 독립을 위한 공채(公債) 모집에 종사할 것을 서약하고 신택균(申宅均)·신현휴(申賢休) 등을 보증인으로 하여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받았다. 류창우는 독립공채를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 1920년 9월 26일 일본 장기에 상륙하던 중,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일로 류창우는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은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2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유병하 집
유병하(1898 - 1987)는 일제강점기 의열단군자금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시현(金始顯)·김지섭(金祉燮)·권정필(權正弼)·황옥(黃鈺)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지시에 따라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장건상(張建相) 등이 조선총독부·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전기회사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1923년 다량의 폭탄과 총기를 만주로부터 국내에 반입하였다. 이 때 부족한 거사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서울 내자동의 이인희(李麟熙)에게 군자금 5,000원을 요구하였으나, 그와 같이 막대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이를 거절하자, 먼저 50원을 받고 잔액은 후일 받기로 하였다. 그 뒤 같은 달 21·24일에 유시태가 남영득(南寧得)과 함께 이인희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잔액을 독촉하다 일본경찰에 의하여 이른바 ‘의열단군자금사건’에 연루된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그 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은 하회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운 표지석이다. 풍산류씨 600년의 역사가 깃든 하회마을은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학문을 닦고 덕행을 기르는 처사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나,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류도발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하였고, 아들 류신영도 1919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목숨으로 저항한 장엄한 역사를 남긴 것이다. 3월 27일에는 마을소년 20여명이 만송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류점등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0년대 들어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류병하는 의열단 의거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류택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펼쳤고, 류시승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나라밖에서는 류소우와 그의 아들 류시보, 조카 류시훈이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하였다.
-
유도발 묘
유도발(1832 - 1910)의 자는 승수, 호는 회은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단식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9월에 전폐(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