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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순국유허비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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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정산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정산마을 표지석은 정산마을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고자 2021년 세운 표지석이다. 예안의 정산마을은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3.1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 그리고 1920년대 신간회 안동지회에서 활약하였으며, 만주지역 항일투쟁사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정산마을의 항일투쟁은 배인환의 애국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던 그는 1912년 일가 10여 호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동진학교.협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아들 배재형은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배재형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 김씨도 18일 단식 끝에 절명하였다. 동포사회를 이끌던 자치단체 한족회는 이러한 김씨 부인의 행적을 기려 1919년 6월 포열장(褒烈狀)을 내렸다. 나라 안에서는 조방인.조병건.조수인이 1919년 3월 17일 예안 3.1운동을 이끌었으며, 박성경.박춘근.이두선은 3월 21일 임동면 편항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 김재원.배동환.이학우는 1920년 흠치교에 가담하여 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이들 가운데 배동환은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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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해 공적비
박진해(1894 - 1951)의 호는 남포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으로 3·1운동의 물결이 퍼져 나간 가운데 안동 지역에서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중 박진해는 3월 17일 예안면 1차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 1차 만세 시위는 이광호(李洸鎬)·이동봉(李東鳳) 등이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쪽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예안면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 시내로 들어가 3월 18일 안동면 2차 시위에 합세하였다. 박진해는 오후 7시경 김창락(金昌洛) 등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돌과 기와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만세를 외쳤다. 또 일제 경찰 세 명을 포로로 잡아 무장 해제시킨 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일로 박진해는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31일과 7월 12일 각각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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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광복운동기념비
삼산광복운동기념비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삼산리 선비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이다. 삼산광복운동기념비는 삼산정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삼산 유정원이 개척한 마을이 삼산리이며, 근대 백 년 동안 선비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가가 속출하였고, 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인사가 많아 이 마을이 주목받고 있다. 1894년 갑오왜란과 이듬해의 을미사변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서파 유필영 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도서기로 참여하고 유창식은 종사관으로, 유인식 등의 문중 청장년을 모아 청량선에 진을 치고 의병을 일으켜 한국독립운동사의 막을 올렸다. 어어 함창, 태봉에 진주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의병 전쟁의 명성을 떨쳤다. 그 때 창식 인식 만식 삼종형제는 계몽주의운동으로 전환시켜 혁신 유림의 단서를 열었다. 천전리의 협동학교와 잔진리의 오산학교, 삼산리야학이 그의 유적이다. 전국적으로는 김대락 이상룡 이중업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김동삼 곽상훈등이 혁신 유림의 대표자들이다. 독립운동도 처음에는 의병운동으로 시작하여 계몽운동으로 발전한 혁신 유림의 역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의 창안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온 문중과 안동의 선각적 지도가를 독려하여 망명길을 열어 독립운동 해외기지 개척을 착수하여 서간도에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곳곳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유인식이 경학사 교부장을 맡고 유연화는 연해주로 가고 유림은 북간도로 들어갔으며 유창식이 망명길에서 순국한 고사가 이때의 이야기이다. 유정희는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상복으로 은거하였으며 일제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 유만식은 동후장터에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하고, 서파는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전국 유림대표 137인의 호응을 얻어 파리장서를 서명하여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대성함과 동시에 혁신 유림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그 작업의 비밀장소가 침산정이다. 1904년 의병운동이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혁신 유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파리장서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니 혁신유림의 역사는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에 의하여 시작되고 완성되어 이곳 삼산리가 그 역사의 고장이 된 것이다. 삼산리 독립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유림과 유기준이 독립군을 거쳐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 또는 광복군으로 망명하여 활약했고 유기준은 끝까지 만주에서 광복군 제3지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유림은 무정부주의운동으로 주목을 받았고, 1926년 유면희가 중앙고보 재학중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학생과학위원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 동산의 장남인 준희는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곽상훈 김구경 박두숙 등과 2년간 운영하다가 강제 폐교 당하고 서파의 지시로 삼산리 야학을 침산정 인근에 유면희 유기태 유기복의 주동으로 동민이 힘을 모아 교사 다섯칸을 건립한 후 16년간 자력으로 유지하였으나 1940년 일경의 방화로 폐교되었다. 1924년 서파가 작고한 전,후에 동산은 이상재 유진태 박중화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교육문화운동과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신간회 안동지회에 유기태 유기만 유기복이 참여하여 영주, 봉화, 영양지회를 이끌고 향교철폐를 비롯한 유교혁신운동과 양력과세를 비롯한 전통개혁운동등 선구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기만 유기일 형제가 안동청년동맹, 예안노농행동대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동산 유인식선생도 고문 여독으로 작고하면서 삼산리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 졌다. 그때 유기태의 고가인 전주유씨 삼산종택을 비롯하여 집집이 독립운동의 유적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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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농고 항일기념비
안동농고항일기념비는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1933년 4월 개교한 안동농림학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이 학교에 배치되어 군사 교육과 근로를 강행해 나갔다. 특히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고 나섰다.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80연대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농림학교의 일부 학생들은 손명술(孫明述)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방송을 듣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권영동·고제하·서정인 등은 일본의 군대로 끌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안동농림학교 8·9회생이던 권영동·황병기·이준택·이갑룡·김오섭·장인덕·김우현·이승태 등은 1943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이 비밀결사에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1944년 방학 무렵에는 단원이 51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회복연구단이 결성되기 이전에 안동농림학교 학생들과 관계된 또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은 명성회(明星會, 또는 여명회)로, 1942년 2월경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던 이정선(李貞善)이 일본 도쿄로 유학 갔다가 1943년 4월 하순 귀국하여 당시 친분이 있던 안동농림학교 9회생 동기들을 규합하여 만든 비밀결사단체이다. 문예서클의 성격을 띤 명성회는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여명(黎明)』이라는 교양잡지를 발간하고, 역사서·사상서 등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 두 단체의 연합은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안동경찰서를 기습 공격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항쟁을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를 기습·점령하여 일본인을 제압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일본 경찰이 이 계획을 알아내고,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10일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대부분의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안동농림학교 항일결사로 인해 체포된 64명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손성한은 순국하였다. 안동 출신의 강일원·고제하·권영동·권오직·권중석·권태염·김건우·김복한·김상우·김호익·김홍구·서정인·손성한·유시승·이대녕·장병하·정현모는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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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기적비
김남수(1899 - 1945)의 자는 중심, 아호는 우전, 학산이며, 일제강점기 안동지방에서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 조선노동연맹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과 김동삼(金東三)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 3·1운동에 참여한 김남수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 들었다. 1920년 가을에 유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김남수의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다가 상경해 동향 출신인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이준태(李準泰) 등과 무산자동맹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6월 경성공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권오설·안상길(安相吉)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해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때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상세하게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사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동청년연맹의 임시의장으로서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청년데이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1925년 10월에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를 결성했는데, 김남수가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또 1925년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참아냈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광복을 맞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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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화 강학소(이산정)
김도화(1825 - 1912)의 자는 달민, 호는 척암이며, 조선후기 『척암문집(拓庵文集)』을 저술한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발표하였다. 또한 안동에 입성한 김도화는 의병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 안동의 의병 수백명이 모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도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1896년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항의문과 규탄문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저서로는 『척암문집(拓庵文集)』이 있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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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부 기적비
서상부(1840 - 1896)는 1896년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진(義城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경북 북부지역의 을미의병은 1896년 양력 1월 20일 안동에서 시작되어 예안·청송·진보·영양·영덕·영해·영주·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의성 등 14개 군에서 일어났다. 의성의진은 1896년 3월 25일 김상종을 비롯한 유림들이 결성하였다. 3월 14일 향회를 열고 공사원(公事員) 이돈유(李敦裕)·신상헌(申相憲)·김익상(金翊相)·구증회(具曾會) 등의 유림들이 김상종을 의병장으로 천거하였다. 의병장 김상종이 주도하는 의성의진은 소모장에 김수욱(金壽旭)·중군장에 권대직(權大稷)·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편성되었다. 의성의진은 대부분 의병장 김상종의 족친과 친구, 그리고 아우 김회종의 절친한 친구 권휘연(權徽淵)·서상부(徐相孚) 등으로 진용이 이루어졌다.의성의진은 1896년 3월 25일 창의한 뒤 4월 2일(음 2. 20) 구봉산전투(九峯山戰鬪) 이후 5월 10일(음 3. 29) 황산에 주둔하고 있던 중 대구와 군위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황산전투(黃山戰鬪)에서 의성의진은 참패를 당하여 권휘연·서상부·김수담·김수협 등 27명이 전사하였다. 서상부는 의병장 김상종의 아우 김회종의 절친한 친구로 의성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황산전투에서 전사·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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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계홍 묘
권계홍(1871 - 1945)의 자는 계승, 호는 해암이며, 조선 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권계홍은 예안·안동·진보·영양 등지를 무대로 활약한 박처사(본명 박인화) 의진(義陣)에서 활동하였다. 박처사는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권계홍은 박처사 의진에 들어가 의병 30~40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자위단(自衛團)과 영양군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과감한 활동을 펼쳤다. 박처사 의진은 1905년부터 1908년 여름까지 활동하면서 류시연·신돌석 의진과 연대를 맺고 있었다. 특히 류시연 의진과 연합하여 1907년 2월 예안분파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1908년에 들어와 임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박처사는 같은 해 5월 임동면 대곡리에서 밀정에게 살해되었다. 박처사가 순국한 뒤에도 권계홍은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14일(음력) 영양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1909년 1월 2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내란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권계홍은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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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무실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무실마을 표지석은 무실마을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안동의 무실마을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굴의 의리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드러나, 18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무실마을의 항일투쟁은 1895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되었다. 기봉 류복기의 10대손 류치호는 의병의 큰 버팀목이 되었고, 류완, 류연박은 직접 의병을 이끌었다. 줄기차게 항전을 이어가던 류시연은 191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12년부터 무실마을 사람들은 정재종가에서 협동학교를 운영하며 민족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 영향으로 학생들은 임동면 독립만세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협동학교도 끝내 문을 닫아야했다. 만세시위를 이끌던 류교희는 6여 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류동혁과 류연성은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류동범과 류세진, 그리고 류연복은 만주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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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금소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금소마을 표지석은 금소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금소마을은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3.1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이를 계획한 사람은 임득연.임범섭.임찬일 등이다. 이들이 광무황제 국장에 참례했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였다. 약속한 3월 21일 저녁이 되자, 100여 명이 금소마을 앞에 모였다. 이들은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뒤, 면소재지인 신덕리로 향하였다. 밤 9시가 되자 참여자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일제 경찰의 탄압에 맞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부수는 등 만세 열기도 한층 격렬해졌다. 결국 경찰의 발포로 금소마을의 신필원.임지열.임호일 등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체포자 가운데 10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금소마을은 독립유공자가 모두 15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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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오대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오대마을 표지석은 오대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오대마을은 1919년 3월 21일 길안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이날 오후 3시 무렵 김정연.김정익.손역학 등은 350여 명의 참여자를 이끌고, 길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6시 무렵이 되자 참여자들은 주재소로 향하였다. 열기가 한층 뜨거워져 주재소를 부수자, 경찰이 공포를 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오대마을은 큰 고초를 겪었다. 3월 22일 김술병.정성흠이 붙잡혀 갔으며, 24일에는 손두원이, 26일에는 김필락이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두 사람을 실제 주도자로 여겨 살해한 것이다. 그 뒤 피신했던 주도자들도 체포되어 모두 10명이 옥고를 치렀다. 오대마을은 독립유공자가 모두 11명이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