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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범 기념비
이성범(1881 - 1957)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 화북면 문장산(化北面文藏山)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區長)으로서 마을 사람 김재갑(金在甲)·홍종흠(洪鍾欽)·이용회(李容晦)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 인근지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국의 독립에 있어서 청년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특히 청년의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4월 8일 오후 2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문장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급보를 받은 상주의 일본군 헌병대장 이하 수많은 헌병들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었으며,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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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사단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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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유적비
상주 화북면에서 1919년 4월 8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의사 전성희, 의사 정양수, 의사 손기찬, 의병장 김용준, 의병장 홍우선 유적비 5명의 선열을 추모하고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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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묘
이강년(1858 - 1908)은 대한제국기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경상북도 문경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8대손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수원의 일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부하인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장례하였다.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군 화북면 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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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리 독립운동 기념비
상주 장암리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어 가는 가운데 1919년 4월에 들어와 화북면 장암리 이장 이성범은 김재갑, 홍종흠 등 면민들과 의논하여 만세운동 권고문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4월 4일부터 인근 마을 여러 곳에 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4월 8일에 신일서숙에 모였다. 오후 2시쯤 속리산 문장대를 향하여 행진하며 태극기 2개를 세워놓고 각 마을에서 올라온 70여 명이 합세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 김재갑, 이용희 등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5년 5월 1일 상수시에서는 장암리 3·1독립운동이 시작된 신일서숙 터에 기념비를 세워 장암리 주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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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 집
최규동(1882 - 1953)은 해방 이후 서울시교육회장, 서울대학교 이사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를 거쳐 정리사(精理舍)의 수학연구과를 졸업하였다. 평양의 기명학교(箕明學校)·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에 교사로 있다가 1918년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강점기 초반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구국애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1주일에 50여 시간을 가르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기록물에서 조선 신궁(神宮: 神社)의 중일전쟁 기원제 발기인 및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평의원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42년 6월 일제 관변지 『문교의 조선』에「죽음으로써 군은(君恩: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글이 게재되는 등 일제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글에 대해 2015년 서울교대 안천 명예교수가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서 주었다"고 진술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같은 해 9월 한국교육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7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일반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교육심의회가 조직되었을 때 제3분과 위원회에서 교육행정분야를 담당하였으며, 1947년 조선전기공업중학교를 인수하여 중동중학교와 함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 뒤 서울시교육회장·서울대학교 이사장·조선교육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49년 제3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 평양에서 작고하였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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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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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환 사적비, 의열각
이경환(1902 - 1929)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28년 11월 25일 일본천황이 경도(京都)에 갔을 때 일제의 한국병탄의 부당성과 총독부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하려고 하다가 경도의 동본원사(東本願寺) 앞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9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귀국하였다. 1929년 11월 25일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였으며, 부인도 뒤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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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집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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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술 기념비
김원술(1893 - 1948)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며, 이명은 김창렬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4월 2일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3,000명 이상의 많은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5년에는 김창숙(金昌淑)이 항일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귀국하였을 때 600원(圓)을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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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서당 성명학교
청천서당은 동강 김우옹 선생을 제사지내던 집으로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청천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지역의 중심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 되었다. 그 후 동강의 12대 후손인 김호림에 의해 청천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지었다. 1910년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청천서당을 성명학교라고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김창숙 선생이 한때 머물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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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흠 묘
백성흠(1888 - 1922)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자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2일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