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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용담정(龍潭亭)은 동학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무극대도(无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곳으로 경주 구미산(해발 594m)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용담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가정리 최제우 유허지)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10세 되던 해에 모친, 16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읜 후 무예를 익히거나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구도하다가 1854년에 부인 박씨의 고향이기도 했던 울산 유곡동(여시바윗골)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도에 정진하였다. 여기서 금강산 유점사에 왔다는 이승(異僧)으로부터 이른바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는 기연을 얻기도 했으나, 득도하지 못한 채 1859년 10월 경주로 돌아와 이곳에서 기거하며 득도하기 위해 정진하였다. 이곳의 부지는 최제우의 조부 최종하(崔宗夏)가 그의 아들 최옥(崔鋈)의 학업을 위해 매입하였으며, 1815년에 최옥이 이곳에 용담서사(龍潭書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울산에서 경주로 돌아온 최제우는 이곳을 용담정(龍潭亭)이라 하고 득도를 위해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온몸이 떨리고 신선의 말씀이 들리는 신비체험을 하면서 득도에 성공하여 동학이 창도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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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묘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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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규 기적비
조경규(1902 - 1988)의 이명은 조인좌이며, '마산3.1운동'을 계기로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하여 자금조달 임무를 맡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봤다. 광복회 대구, 경북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과 경주지역사회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1988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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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활동지(효현교)
효현교는 광복회 활동의 기폭제 배경이 된 다리이다. 광복회는 1913년 고헌 박상진 의사에 의해 결성되었다. 광복회 총사령에는 박상진, 부사령에 이진룡이 선임되었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김좌진이 뒤를 이었다. 광복회는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해만주에서 독립전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활동을 했고 이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1915년 우재룡과 권영만이 효현교에서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운반하는 우편마차에서 거액의 세금을 탈취했고 이는 광복회원들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는 박상진의사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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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진 현창비(개진면 양전리)
곽태진(1917-2006)은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서 아버지 곽종의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금선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2년 3월 성일영·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현풍신사(玄風神社)에 방화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령군·청도군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야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같은 날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946년 한국민주당 경북도당 청년부장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29일 서민호(徐珉濠), 엄상섭(嚴詳燮), 고영완(高永完) 등 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53년 민주당 발기인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민의원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81년∼1985년까지 민권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 독립운동가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4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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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 사적비
김상덕(1892 - 1956)은 1919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우송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민대표회와 재만농민동맹, 대한청년동맹회,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밖에도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했고, 중국에 파견되어 대일한중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으며,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선전위원회 위원에 피선, 학무부 차장 및 민족혁명당 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후 반민특위 위원장도 역임했다. 1990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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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열 현창비
김재열(1880 - 1967)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조직한 독립단체였던 조선국권회복단의 계몽주의적 성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풍기광복단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김재열은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대한광복회가 추진한 친일파 처단 활동에 참가했다. 1990년 정부는 김재열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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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돈 현창비
최영돈(1897 - 1985)은 1919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주동하고 대구만세사건에 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 체포돼 태형 90대를 받았다. 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다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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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우 순국기념비
남형우(1875 - 1943)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고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했다. 1915년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했다. 이후 대한국민의회의 산업총장에 선임되어 활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법무총장, 교통총장,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 등에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다물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시사책진회를조직하여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30년에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발병으로 복귀했다. 1983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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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휴 기념비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애국지사 해영 신철휴(1898 - 1980)선생 기념비이다. 1919년 만주에서 의열단 결성에 참가해 의열단 첫 사업인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에 참여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7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이후 ‘경북의열단사건’, ‘청주일심단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고 1928년 신간회 고령지부장으로 활약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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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고령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할 목적으로 획책한 국채1300만원을 갚는다는 국권수호운동이다. 대구단연회에서는 고령향교에 공함을 보내 단체 결성을 요청했고, 홍와 이두훈 선생이 고령단연회 회장직을 임명받았다. 활발히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의연금 처리가 해결되지 못하자 고령향약회가 중심이 되어 본군의 의연금을 향중에서 관리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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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회 추모비
이병회(1865 - 1927)의 ‘휘’는 ‘병회’이고, ‘자’는 ’음두‘이다.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에 통분한 유림계에서 작성한 파리장서에 이병회는 137명의 한국 유림 대표중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파리장서는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고, 국내외 각 향교에 우송되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