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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구 묘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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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기념비
정수기(1896 - 1936)는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27년 수감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고문으로 인해 발병하여 가석방되었으나 41세의 나이로 곧 사망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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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 묘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김대지의 묘이다.김대지(1891-194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교통 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지원했으며,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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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 집
최완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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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집
최준(1884 - 1970)은 독립유공자 최완의 형이다. 최준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했고,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항일투쟁을을 전개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냈으며, 경주고적보존회 설립, 동경통지 편찬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최준은 해방 직후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이는 오늘날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준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의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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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묘
박상진(1884 - 1921)의 '휘'는 '상진'이고 '호'는 '고헌'이다. 박상진은 판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부임을 거부하고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했고,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만주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1913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면서 상업조직을 8도 각지에 결성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했다. 1918년 일경에 체포되어 4년의 옥고 끝에 순국했다. 1063년 정부에서 박상진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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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묘
최준(1884 - 1970)은 독립유공자 최완의 형이다. 최준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했고,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항일투쟁을을 전개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냈으며, 경주고적보존회 설립, 동경통지 편찬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최준은 해방 직후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이는 오늘날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준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의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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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표지석
표지석은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일어난 '경주3.1운동'을 기리는 표지석이다. 위 사적은 경주 봉황상가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3.1운동은 노동리교회 신자를 중심으로 계획되었으나 발각됐다. 하지만 군중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며 종교인 및 수많은 읍민이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2022년 경주시에서 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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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규 묘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애국지사 일성 조경규 묘소이다. 조경규(1902 - 1988)의 이명은 조인좌이며, '마산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하여 자금조달 임무를 맡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봤다. 광복회 대구, 경북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과 경주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1988년 타계했다. 경주시 석장동 산 입구에 조경규 묘소 표지석이 위치해 있고 묘소는 산속에 있는 금장대 부근에위치해 있다. 경주 황성공원에 조경규 기적비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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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득 항일기공비
애국지사 김만득공 항일기공비이다. 김만득(1916 - 1950)의 본명은 '철해'이고 '휘'는 은열 40대손이다. 김만득은 일본유학 생활 중 차별대우로 분개하여 소란을 일으켰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중국 강서성 구강 주둔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 중 1943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했고, 강남분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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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공적비
김종철(1888 - 1941)은 3.1독립운동 이후 의용단에 가입했고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붙잡혔지만,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만주로 탈출한 뒤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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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 묘
최완(미상 - 미상)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