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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용 묘
노기용(1897 - 1975)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위하여,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21년 8월에는 경주군 양북면 최세림(崔世林)의 집에, 9월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3년 4월에는 합천군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11월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잡힘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듬해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자,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은 징역 5년형으로 감형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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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유적비
전영우(1886 - 1962)의 이명으로는 전하선이 있다. 전영우는 1919년 3월 경남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 초계리(草溪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원화(李源華)ㆍ성만영(成萬永)ㆍ김덕명(金德明) 등과 3월 21일 초계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참여자를 모으면서 준비에 나섰다. 3월 21일 오후 1시가 되자 시장에 나온 군중이 4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원화ㆍ성만영ㆍ김덕명 등과 함께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군중을 이끌고 행진하다가, 초계우편소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일제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며 위협하자, 군중은 격분하여 경찰 2명을 때려 눕혀 중상을 입혔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이끌었던 전영우는 이후 종적을 감추어 옥고를 면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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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구 추모비
전석구(1896 - 1970)는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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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구 묘
전석구(1896 - 1970)는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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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수 행적비
유인수(1886 - 1947)는 1919년 3월 20일 대병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유인수는 1919년 3월 20일 합천군 대병면(大幷面) 창리(倉里)에서 임상종(林尙鍾)을 중심으로 권영두(權寧斗)·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 등과 함께 창리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로 협의하고, 3월 초순경에 임상종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장날인 3월 20일 미리 마을을 순회하면서 규합한 동지들과 장터에 모인 4,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를 벌였다. 군중의 기세는 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폭발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온 일군경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주재소로 달려가 문서와 기물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0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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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묘
김영기(1871 - 1919)는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와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3월 20일 그는 대양면 마정부락에 모인 시위군중 중에서 심맹권(沈孟權)·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외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여기에는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오후 7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행진하고, 이어 경찰서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서장은 먼저 해산을 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내로 몰려들었다.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며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추용만 등 결사대와 함께 서내로 돌진하였다. 이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의 발포로 김영기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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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호 공적비
노응호(1911 - 1933)의 이명으로는 노룡호(盧龍昊)가 있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재학 중, 서울지역에서 전개된 학생전위동맹의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발단된 광주학생운동은 11월 3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생시위가 일어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시위 소식이 목포·나주 등 전남지역으로 전해지면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서울로 점화되면서 1930년 3월까지 전국 각처와 국외에서 전민족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의 학생시위 소식이 서울에 전달되자, 서울지역 학생운동단체였던 비밀결사 학생전위동맹의 주도아래 학생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이때 노응호는 경성제일고보의 조직을 맡아 학생시위를 추진해 갔으며, 1929년 12월 4일 경성제이고보를 시작으로 서울 학생들의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서울 지역 학생시위는 처음 학교단위로 전개되었으나 학교간의 연합시위로 발전되었고, 연인원 10,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학생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힌 그는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며, 1930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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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찬규 묘
변찬규(1906 - 1950)는 1932년 3월 경남 합천군 낙동농민조합(洛東農民組合) 초계지부(草溪支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초계지부 위원장으로 동년 5월 조합원들과 함께 국사봉에 올라 메이데이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5월 1일 경동면 관평리 야학교 내에서 메이데이 기념식을 거행할 당시 "땔감의 자유로운 채취, 부역의 공평한 부과, 조선인의 일본내 자유로운 여행" 등을 요구하며 총독의 시정방침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다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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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 기적비
김영조(1906 - 1953)는 일제하 민족적 색채를 띤 종교가 널리 퍼지던 중, 삼신교(三神敎)라는 종교를 믿게 되었다. 삼신교는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에 사는 연정원(延鄭元)이 포교(布敎)한 것으로, 천(天)·지(地)·인(人)의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파였다. 김영조는 1935년 초 삼신교를 믿게 되면서 이종철(李鍾喆) 등을 신도로 포교하였다. 그후에도 1943년 3월 중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 이모(李某)의 집에서 같은 군 창천동에 사는 송영상곤(松永相坤) 등에게 삼신교의 종지를 설파하였다. 또한 김영조는 1943년 4월 초경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감혜사(感惠寺)의 승려 등 3명에게도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사정을 말하고, 일제의 군대가 태평양과 동남아지역에서 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김영조는 삼신교를 믿으면 민족독립을 달성할 수 있고 일제가 침략전쟁을 감행하였으나 동남아 각지에서 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이에 일제는 김영조를 ‘유언비어’를 날조하였다고 하여 검거하였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상소, 1944년 1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김영조는 대구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6월 21일 출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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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영 묘
성만영(1875 - 1936)은 1919년 3월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서울 및 전국 각지에 울려 퍼지게 되자 이곳 합천군 초계면(草溪面)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무릉리(武陵里)에 사는 유지 이원화(李源華)·전하선(全夏善)·김덕명(金德明) 등과 함께 3월 21일 초계리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약속하고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이들은 장날인 3월 21일 당일 장터에 모인 4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초계우편소(草溪郵便所)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기물을 파괴하고 일경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에 시위가 중단되고 동료들과 함께 그도 붙잡혔다.그리하여 같은 해 8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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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렬 비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3·1독립운동의 조직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3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에 보천교(普天敎)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후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4년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찰관서 등 일제의 주요 관서 폭파 및 고관 암살 등을 기도하던 중 일경에 의해 붙잡혔다. 그리하여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합천에서 삼일의숙(三一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광복이 될 때까지 임정의 경남내무부장(慶南內務部長)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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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3.1독립운동기념탑
합천 3.1독립운동기념탑은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일해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날 시위를 시작으로 각 장날을 따라 독립만세 시위가 잇따랐고, 3월 23일 삼가장터 시위에는 13, 000여명의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 4월에 들어서도 3일 가야면 매안리 시위, 7일 봉산면 술곡리 시위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합천군의 3·1독립운동은 그 시위 규모가 컸을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격렬하였고, 삼가시위의 경우와 같이 여러 면이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합천3·1독립운동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이 탑을 세웠다.합천의 3.1운동 전개 양상은 다음과 같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는 1919년 3월 18일 삼가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당시 서울에 있었던 정현상(鄭鉉相)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고향에 돌아와 형 정현하(鄭鉉夏)에게 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이기복(李起馥)도 독립선언서를 구하였다. 정현상과 이기복은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3월 18일을 거사 날로 잡았다. 이날 300~4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누비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합천읍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갖고 돌아온 강홍렬(姜弘烈)이 이를 전 군에 전달하면서 3월 19일과 20일, 그리고 22일에 대양면(大陽面) 주민들이 주도한 합천 읍내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만세시위는 3월 20일 대병면(大幷面) 창리(倉里) 시위, 3월 21일 초계면(草溪面) 초계리 시위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위의 열기는13,000명의 군중이 3월 23일 삼가장터에서 벌인 시위로 그 절정에 달했다. 시위 군중은 일제의 관공서를 부수고, 문서를 불태우거나 전선을 잘라 통신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무차별 사격과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날 현장에서 13명이 순국하였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외에도 총 10여 곳에서 13회의 시위가 있었다. 합천군에서 일어난 시위들은 규모도 크고 시위 양상도 가장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