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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선 묘
이용선(1882~1960)은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대양면 마정부락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심맹권(沈孟權)·김영기(金永琪)·손득룡(孫得龍)·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등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읍내 광장에서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오후 7시경 경찰서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서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결사대원과 함께 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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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홍의 기적비
문홍의(1921~1951)는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에서 다혁당을 조직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문홍의는 1939년 10월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이태길(李泰吉)·유흥수(柳興洙)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뜻을 모으고,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는데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들이었다.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이태길·강두안 등 위의 동지들과 함께 항일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동지포섭과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민족문화 존중 및 항일의식을 고양하였다. 1941년에는 유흥수·권쾌복(權快福)·배학보(裴鶴甫) 등 15명과 함께 항일학생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교내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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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순 기념비
신원순(1890~1961)은 1919년 당시 합천군 묘산면(妙山面)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같은 면내의 윤병석(尹炳奭)·윤병은(尹炳殷) 등 동지들과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각 면 각 동리 인사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의 준비를 갖추고 거사일은 3월 22일로 약속하였다. 1919년 3월 22일 100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주동인물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그들의 선창에 따라 시위대열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묘산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때 그는 성경술(成敬戌)과 함께 일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沿道)의 전화줄을 절단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군중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현장에 급파된 일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그를 비롯한 주동인물들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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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수 집(묵와고택)
윤중수(1891~1931)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한국유림들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운동에 함경남·북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김창숙(金昌淑)·성태영(成泰英)·유진태(兪鎭泰)·유준근(柳濬根)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한국 유림들의 의사를 집약한 파리장서를 제출키로 결의하고, 3월 4일 다시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함경남·북도의 서명운동 책임자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 파리장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미서명자 제2진 23명 중의 한 사람이며 1925년 제2차 유림단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주동하였다. 그후 1921년 11월 11일에는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한 한국독립진정서(韓國獨立陳情書)의 합천군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그후에도 신채호(申采浩)·김창숙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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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수 공적비
윤중수(1891~1931)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한국유림들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운동에 함경남·북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김창숙(金昌淑)·성태영(成泰英)·유진태(兪鎭泰)·유준근(柳濬根)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한국 유림들의 의사를 집약한 파리장서를 제출키로 결의하고, 3월 4일 다시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함경남·북도의 서명운동 책임자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 파리장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미서명자 제2진 23명 중의 한 사람이며 1925년 제2차 유림단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주동하였다. 그후 1921년 11월 11일에는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한 한국독립진정서(韓國獨立陳情書)의 합천군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그후에도 신채호(申采浩)·김창숙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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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호 의적비
공민호(1880~1948)는 1919년 3월 19일 합천군 삼가읍(三嘉邑) 장터에서 정방직(鄭邦直)·정각규(鄭恪圭)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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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은 정현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 있던 정현상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독립선언서를 고향 쌍백면에 전달했다. 이기복도 이원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고는 각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 양측에 참여했던 정연표가 만세운동을 합해서 치르기로 하고 거사일을 3월 18일 삼가 장날로 정했다. 이들은 오전부터 미리 시장으로 가 있었고, 오후가 되면서 군중이 모여들자 정연표가 숨겨 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경찰 주재소를 포위했다. 일제 경찰에 일본인 재향군인까지 합세해 강제해산시켰다. 3월 23일 쌍백면에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공사겸과 정원규, 진택현, 오영근, 정치규 등이 군중과 합세해 쌍백면사무소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고,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수천의 군중은 삼가읍 시장까지 몰려가면서 전신주 2개를 파괴해 일제의 통신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합천 삼가장터3·1만세운동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6년 5월 20일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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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 3.1운동기념비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은 정현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서울에 있던 정현상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독립선언서를 고향 쌍백면에 전달했다. 이기복도 이원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고는 각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 양측에 참여했던 정연표가 만세운동을 합해서 치르기로 하고 거사일을 3월 18일 삼가 장날로 정했다. 이들은 오전부터 미리 시장으로 가 있었고, 오후가 되면서 군중이 모여들자 정연표가 숨겨 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도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경찰 주재소를 포위했다. 일제 경찰에 일본인 재향군인까지 합세해 강제해산시켰다. 3월 23일 쌍백면에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공사겸과 정원규, 진택현, 오영근, 정치규, 윤성현, 공재규 등이 군중과 합세해 쌍백면사무소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고,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수천의 군중은 삼가읍 시장까지 몰려가면서 전신주 2개를 파괴해 일제의 통신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쌍백 3.1운동기념비는 위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쌍백초등학교 정문 앞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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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집
김상진(1897~1946)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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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묘
김상진(1897~1946)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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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윤 추모비
유재 전석윤(1894~1966)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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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용 숭모비
노기용(1897~1975)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위하여,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21년 8월에는 경주군 양북면 최세림(崔世林)의 집에, 9월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3년 4월에는 합천군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11월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잡힘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듬해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자,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은 징역 5년형으로 감형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