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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윤 묘
전석윤(1894~1966)의 이명으로는 전석탁, 김석탁이 있다. 전석탁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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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 집
문용(1861~1926)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문용도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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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두 묘
권영두(1894~1961)은 1919년 3월 20일의 대병면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유인수(柳仁秀)·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 등과 밀의를 통해 3월 20일의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인근 부락에도 이 계획을 알렸다. 3월 20일 오후 1시, 그는 장터에 모인 4천여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준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장터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창리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드디어 정문을 박차고 소내로 돌진하였다. 이때 선두로 들어가던 이병추(李秉樞)가 순사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관통되어 유혈이 낭자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소내로 밀어닥쳐 순사부장과 경찰들을 구타한 후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주재소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또한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수십명의 일본군이 도착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면서 시위군중을 검거하기 시작하게 되자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10월 6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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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담정(梧潭亭)
문용(1861~1926)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문용도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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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 묘
문용(1861~1926)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문용도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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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섭 묘
정태섭(1900~1965)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경남 합천군(陜川郡)으로 독립선언서 500매를 가져와 비밀리에 합천군내 각 면에 배부하였다. 정태섭은 3월 18일 이기복(李起馥) 등 동지 20여 명과 함께 합천군 대병면 금곡리(金谷里) 곽씨산정(郭氏山亭)에 모여 3월 20일 창리(倉里) 장날로 시위날을 잡았다. 또한 이렇게 3월 20일 창리 시장에서 2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촉매 역할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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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희 사적비
박익희(1853~1922)의 이명은 박희익이다. 그는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곽종석 등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호응하여 경남북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승인 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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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파리장서유적비
독립유공자 파리장서유적비는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896-3 은진송씨 세거지에 위치해 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인 파리장서사건 중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합천군 출신 11명이고, 11명의 서명자 중에서 은진송씨(恩津宋氏) 충순위공파 사람들 5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이다. 파리장서사건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서한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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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도 공적비
권석도(1880 ~1946)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의병장이 되었다. 1908년에는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붙잡혔다.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山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후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붙잡혔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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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정
수암정은 대양면 3.1운동을 계획한 장소이다. 서울과 인근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김영기·배상기·심맹권·이용선·손득룡·추용만·강홍렬·심재기·강시만·박운표·김호수·주경천 등은 대양면 대암리 수암정에 모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합천면 장날인 3월 19일 태극기를 들고 합천읍으로 들어가 오후 4시경에 장터에 모인 500여 명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2차 만세운동은 3월 20일 대양면 마정마을에 모여 전날 일제 경찰에 검거된 17명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6㎞ 거리인 합천읍내로 행진하면서 일어났다. 오후 7시경에 김영기 등 주민 500여 명은 합천경찰서로 가서 구금된 심맹권 등 17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합천경찰서를 습격하고, 일제 경찰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총격을 가해 4명이 순국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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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맹권 기적비
심맹권(1894~1961)의 이명은 심재현이다. 심맹권은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대양면 마정부락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 자리에서 결사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하여 김영기(金永琪)·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등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오후 7시경, 경찰서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결사대원과 함께 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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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기 묘
배상기(1892~1967)는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그는 대양면 마정부락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함께 오후 7시경,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는데,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김영기(金永琪)·추용만(秋鏞滿) 등의 결사대원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들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