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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연준 기념관
애국지사 손종일 선생과 아들 되시는 손연 목사를 기리고자 그의 출생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손연준(이명 손양원, 1902-1950)은 해방 이후 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된 목사로 호는 산돌이며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손종일(1871-1945)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장로였으며 경남 함안군(咸安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2006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연준은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194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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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호 묘
안종호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2시, 그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5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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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규 추모비
조진규는 1904년 9월 15일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서 태어났다. 16세의 나이로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38세로 작고할 때까지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함안 경찰 주재소 및 함안 등기소 등에 돌을 던지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후 동아일보사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함안 형평사 창립 임시 의장, 함안 소작인 조합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착취와 탄압을 막아 내고 주민 계도에 앞장섰다. 1924년 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때에는 예비 검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7년 상해 독립단경남 대표로 선임되어 안재홍(安在鴻)과 대한 독립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석건, 조한휘(趙漢輝)와 함께 신간회 함안 지회를 결성하고 농민 조합도 만들어 항일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3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당에 입당하고, 1935년 나진·웅기 등지에서 노동 쟁의를 주도하다 신징[新京]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귀국하였다. 옥살이와 울분이 병이 되어 1941년 8월 10일 38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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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제 묘
조강제(1923 - 1950)는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동교의 항일결사 문예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지며 독립의식을 길러갔다.그 후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를 자퇴하고 고향인 함안에 내려가 사설강습소를 열고 농촌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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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 묘
이용우(1898 - 1930)는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장례식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그들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그는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그곳들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가 합세하여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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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석 추모비
이희석(1892 - 1950)은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식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는 조한휘로부터 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전해듣고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조한휘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1장 분량으로 개작·축소하여 다량 등사하였다. 3월 19일 정오, 그는 이찬영과 함께 인근의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출동한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시 피신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이해 12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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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규 묘
조용규(1880 ~ 1944)는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식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되었다. 3월 19일 그들은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출동한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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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룡 전적비
석상룡 선생은 경남 함양 출신으로,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 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산청(山淸)·남원(南原)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체로 지리산(智異山)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었다.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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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 출가 사찰(영원사)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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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익 묘
김한익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사람이다.1919년 4월 2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28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이에 격분한 그는, 다음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인근지역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4월 2일 아침 일찍 자기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가지고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5시경, 3천여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2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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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사당(의재사)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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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집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