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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항일독립기념탑
이 곳은 국가보훈부 지정 국가현충시설로, 하동 지역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기리기 위하여 2014년 삼일절에 준공되었다. 하동항일청년회관, 하동 항일독립운동 약사, 대한독립선언서 비,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등의 조형물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건립 취지문, 헌시, 하동지역 독립유공 서훈자 명단 등을 기록한 비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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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 의총
일제 강제병합이 있기 2년 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하며 결사 항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 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 역사관 뒤 능성)에 초병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길목(발 등 덮개)을 만들게 하고 음력 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철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 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 공격을 했다. 항일 의병 80여 명 중 50여 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 때 주민 일부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등, 전평전 및 계곡 산 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 곳 30명의 무명 항일 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봉분이 훼손됨에 안타까워 하동 군민의 정성을 모아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삼가 항일 의병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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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
이 기념비는 1919년 4월에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이강률(李康律 :1996년 대통령 표창), 임만규(林萬圭 : 1993년 대통령표창), 이정수(李汀秀 : 2002년 건국포장) 선생 등의 주도로 전개된 3.1독립만세운동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하동군 화개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6일 쌍계사(雙溪寺) 승려인 김주석(金周錫).학생 정상근(鄭湘根).양봉원(梁奉源) 등이 일으킨 후 이강률.이정수.이정철(李正哲).임만규 등이 다음 장날인 4월 11일에 더 큰 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정하고 면직원들의 사임과 독립운동 참가 권고문을 작성하여 4월 10일 밤 면사무소 정문에 붙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1일 정오경에 주도인물들은 화개시장에서 운집한 사람들과 만세시위를 하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고, 이 일로 이강률.이만규 선생은 징역 8월, 이정수 선생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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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처 함안 조씨 열녀비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자인 이인구 선생의 부인 함안 조씨를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옥고를 치른 이인구 선생의 최후와, 이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선 선생의 부인, 함안 조씨의 이야기, 그리고 이로 인해 옥고를 겪게 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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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3.1운동기념탑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간 3천여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경찰서장과 군수를 붙들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평소 감정이 나빴던 등기소·우편국·일본인소학교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일경은 마산으로부터 일군의 지원을 받아 총검으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인물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피신한 조상규 의사 등은 3월 20일 군북시장에서 3천여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또 다시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이에 당황한 일군경은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였으며 18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상을 빚었고 수십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기념탑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한 독립유공자이자 시인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헌사가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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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규 묘
조석규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한 뒤, 조경식(趙璟植)·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피신하여 다시 군북장날인 3월 2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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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감찰공파 일문 4지사 의열비
함안지역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네 분의 조씨 형제 지사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2002년도에 건립되었다. 조석규, 조주규, 조창규, 조형규 네 분 지사는 1919년 3월 20일 군북면 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이로 인해 조주규 선생은 진압에 나선 일경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 세 분 형제들은 징역 2년에서 4년에 이르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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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호, 송길호 비
순국선열 송문호 선생과 그 동생분이신 송길호 선생의 비석이다.이 비석은 군북면 3.1운동에 나섰다가 순국한 송문호 열사, 총탄을 맞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가신 송길호 의사 두 분 형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송문호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시위군중은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 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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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호 유허비
안지호 선생은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咸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감부(統監府)와 일본 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차례 구금되었으며, 1910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朝鮮總督)인 사내(寺內)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내었다가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馬山)지청에서 징역 3월에 2년간 집행유예형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한문교사로 있던 그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의 배후 고문 역할을 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같은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연락하였다. 이에 따라 3월 19일 정오부터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장터를 출발하여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도처에서 일본 군경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후 그는 이곳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부산감옥 마산분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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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용 기적비(충혼각)
1919년 3월 경남 함안군(咸安郡) 함안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성용 의사의 기적비이다. 함안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가했다가 귀향한 조한휘(趙漢輝)ㆍ한종순(韓鍾淳)ㆍ이찬영(李讚榮)ㆍ조병흠(趙丙欽)ㆍ박건병(朴建秉)ㆍ강기수(姜琪秀)ㆍ한관렬(韓灌烈)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학 훈장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 함안 읍내 장날을 만세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용도 3월 19일에 함안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큰 깃발을 치켜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함안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경찰들이 이를 저지하며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군중은 6회에 걸쳐 도끼, 몽둥이, 돌을 들고 주재소에 들어가 공문서와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순사부장과 함안군청, 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 함안공립보통학교, 우체국, 일본인 소학교를 공격하였다. 김성용도 함안경찰관주재소 등에 돌을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騷擾罪)로 징역 1년을 받았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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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기념관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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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대 묘
조용대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