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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호 묘
조윤호(1888 - 1950)는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각 지방의 독립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경상남도 지역의 애국인사들은 비밀리에 3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3월 23일 주동 인물들은 장 한가운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앞장서서 외쳤다. 여기에 6,000~7,000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헌병 및 경찰관 주재소원만으로는 손도 쓸 수 없게 되자 일본군 대병력이 동원되었다. 이 때 주동 인물 31명이 검거되었다. 1차 의거에 이어서, 4월 2일 제2차 의거로 이어졌다. 조윤호를 비롯한 15명은 4월 2일 장날을 재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면서 주변 지방에도 비밀연락을 취하였다. 4월 2일 오후 3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조윤호 외 15명의 청년 주동 인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군중들도 호응하여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본 경찰의 대응 또한 신속했다. 주재 일본군 현병은 주동 인물 1명을 검거하고 총검으로 군중들을 위협하여 만세시위는 일단 차단된 듯하였다. 그러나 분을 참지 못한 상인들은 노점과 상점의 문을 닫고 다시 만세를 외쳤다. 또 다시 6,000~7,000명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는 제1차 의거보다 강력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 때 조윤호를 비롯해 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희순(曺喜舜) 등 주동 인물 20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윤호는 이들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으로부터 6개월간의 형을 언도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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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훈 묘
김진훈(1924 - 1945)는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金一圭) 등과 함께 은사 허 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1941년 겨울에는 그의 집에서 독서회원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당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양중모의 집에 다시 모여 군사기밀 탐지·일군 탄약고 폭파·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계획등을 세웠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는 붙잡힌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45년 6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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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읍민만인운동비
창원읍민만인운동비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두럭어린이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창원시에서 창원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5년 1월 1일 창원 장터 인근에 이 비를 세웠다.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는 가운데, 창원지역 주민인 김태순과 박화열 등은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창원 장날 시장 한 가운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시장에 모인 6,000 ~ 7,000여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일본 헌병 경찰은 진압에 나서 3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4월 2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나자 주재소 헌병과 마산헌병분견소 헌병들은 무력으로 진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박화열(1898 - 1936)은 경남 창원군 창원읍 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두 차례 참여하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1차 시위는 1919년 3월 23일 창원읍 장날이었다. 6,000~7,000여 명의 장꾼이 모여들자, 주동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 함성이 진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31명이 붙잡히면서 해산되었다. 이때 체포를 면한 일부 주동자들은 4월 2일 장날을 2차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 연락을 취하였다. 거사 당일 청년 15명은 오후 3시경 많은 장꾼들이 몰려들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상인들도 호응하여 합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증원 병력을 얻어 총칼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박화열은 1921년 9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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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항일독립운동기념탑
경남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 및 유공자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공원 가운데 기념탑에 건국훈장 수훈자들의 이름을 유리에 써 놓았다.3.1 만세운동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임시정부, 의열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애국지사와 유공자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 3월 1일 삼일절에 건립되었다. 조성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만열 박사가 경남항일운동 약사를 썼으며, 경남도의 지원으로 탑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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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기념관
주기철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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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독립만세운동 웅동지역 발원지
4월3일 만세운동은 1919년 일제 강점기의 진해가 군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일제가 헌병과 경찰을 많이 배치했었고, 한국인 보조 헌병이나 경찰들이 항시 주민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감시를 하고 있어서, 항일운동을 하기란 매운 어려운 실정이었다. 당시 마천동 소재 계광학교 에서는, 민족사상이 투철한 교사 배정환, 허전, 주기용, 신자균 등이 학생들에게 나라잃은 슬픔과 광복의 긴급함을 강조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만세 부르던 그날 약 200여명 가량의 군중이 모였고, 주기용 선생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힘차게 낭독, 이어 이부근의 선창으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진해만으로 퍼지고 팔판산으로 메아리 치면서,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군중은 마천 냇가에서 면사무소가 있는 소사동으로 가서 면장을 만세 부르게 하였고, 시위 군중들은 산을 넘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대가 있는 웅천동 성내로 들어가서 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이 늘어나면서 헌병들은 칼과 총으로 진압하자, 맨주먹의 시위대는 무너지고 흩어지면서, 군중을 비롯한 잡혀간 자가 무려 약 40여명이 되었던 만세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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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동3.1독립운동기념비
919년 4월 3일 창원군 웅동면 마천리(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마천동)에서 3·1만세운동을 일으킨 30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고자 건립한 기념비이다. 원래의 비는 1986년 8월 15일에 당시 진해시 두동에 12m 높이로 건립하였으나, 이후 주변 여건의 변화와 비석의 노후화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에 새로 건립하여 2009년 1월 27일에 준공하였다. 기념비는 '영원한 비상(飛翔)'을 주제로 하여 화강석과 브론즈를 재료로 제작하였으며, 높이는 22m, 부지 면적은 1040㎡이다. 앞면에 '3·1독립운동기념비(三·一獨立運動紀念碑)'라고 한자로 새기고 기둥에 건립기를 새겼으며, 뒤편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새긴 부비(副碑)를 세웠다. 2009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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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집 터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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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기념비
주기철 목사는 경남 창원 사람이다.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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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효 공적비
주기효(朱基孝, 1877~1941) 웅천 북부 출생. 자(字)는 우원(于願), 아호(雅號)는 석천(石泉). 일찌기 근대교육기관으로서 1906년 웅천사립개통학교(熊川私立開通學校)와 여자전문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설립, 웅천의 후진들을 위한 육영사업을 한 선각자이다. 더 많은 교양과 지식을 보급하고자 웅천도서원(熊川圖書阮)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 주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실업조합(實業組合)과 흥업조합(興業組合)등을 설립하여 민족실업 진흥운동을 전개 하기도 하였다. 이 공적비는 웅천의 국도변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41년 9월에 세운 것으로 1873년 11월에 어지럽게 관리되고 있는 공적비를 안타깝게 생각한 당시 김준봉 웅천동장이 웅천초등학교의 설립자 공적비이기에 사비를 들여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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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완 집
허장완 선생은 경남 통영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3일 통영읍(現 忠武市)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3월 9일과 3월 12일 진평헌(陳 軒)·김형기(金炯綺)·양재원(梁在元)·배익조(裵益祚)·모치전(牟治田)·강세제(姜世濟)·이학이(李學伊)·권남선(權南善) 등과 만나 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3월 13일 오후 8시경, 통영면사무소 등사판을 가지고 10여리쯤 떨어져 있는 산양면(山陽面)사무소로 가서 그곳의 등사판과 2대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진평헌이 기초한 격문 1천 2백여매를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등사에 필요한 용지 2천매를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촌상점(中村商店)에서 구입하였는데, 그 주인이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즉시 수사에 나섰다. 한편 이 사실을 모른 채 그는 이튿날 새벽 1시 30분경, 등사를 끝내고 등사판을 돌려주기 위하여 통영면사무소로 가던 도중 매복중이던 형사대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3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을 당하여 10월 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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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공적비
김철호 선생은 경남 통영 사람이다. 중국 광동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오성륜의 권유로 1926년 8월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 무렵 의열단은 근거지를 상해에서 광동지역으로 옮겨 유오한국혁명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에 앞장서 나갔는데, 그는 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고 전국 각처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될 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았다. 이 같이 그는 신간회 통영지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가 귀국하자 마침 열리게 될 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1929년 10월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