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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집 터
장석천(1903~1935)은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동년 7월에 귀향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지원하였고, 1927년 3월 졸업기를 당하여 성진회원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그는 동년 4월에 전라청년연맹 당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동년 3월, 광주내 각 학교의 졸업기에 임하여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초대하고 항일운동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나승규(羅承奎)·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소비조합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에 관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각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운동전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전국적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협의하였다. 동월 12일에는 서울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학생의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함께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소요배후조종자로 일경에 붙잡혀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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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안내판
장석천(1903~1935)은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동년 7월에 귀향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지원하였고, 1927년 3월 졸업기를 당하여 성진회원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그는 동년 4월에 전라청년연맹 당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동년 3월, 광주내 각 학교의 졸업기에 임하여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초대하고 항일운동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나승규(羅承奎)·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소비조합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에 관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각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운동전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전국적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협의하였다. 동월 12일에는 서울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학생의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함께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소요배후조종자로 일경에 붙잡혀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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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 흉상
송홍(1871 ~ 1949)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운인공은 한말에 일본인의 횡포를 제지코자 5차의 상소와 복합상소 일헌에게 체포되어 옥고 출사표와 귀거래사에 필적하는 명문의 복합상소문(한자 1334자) 을 올리고, 중국 망명 귀국 후 교육혁신방안의 제창 광주 농고 광주고보 등에서 교사생활 20여년 3.1운동때 격문을 지어 공포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일시 미국 망명 제자들에게 애국애족정신 민족의 얼을 고취시켜 1929년 드디어 광주학생독립운동 의거 15년 간의 고분당생활 8.15 해방 후 광주서중과 광주의대에서 국사학 강의 1949년 6월 18일 광주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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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교회(3.1운동참여교회)
범어교회는 대구지역 선교사였던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1897년부터 1921년에 걸쳐 설립한 지역 교회 중 한 곳이다. 아담스 선교사는 제일교회를 비롯한 대구 최초 교회와 근대적 교육기관(계성학교, 신명학교), 병원 등을 설립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범어교회는 1903년 사월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은 이들이 기도모임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1906년 아담스 선교사를 통해 교회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범어교회의 첫 사역자인 김기원은 대구경북 최초의 조사, 장로이자 목사였다. 제1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염봉남 목사도 이 곳 조사로 사역했다. 일제강점기 사경회를 열고 꾸준히 신앙을 지도해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1800년대 영어성경본, 1915년 고어 묵시록 주석 등을 사료를 소장하는 등 일제강점기 지역 항일활동의 종교적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범어교회의 역사적 가치가 높게 사료되어, 2019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에 의해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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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만세로
3.16 만세로는 1919년 대전지역 만세운동의 시발점이였던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확산하고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코자 지정한 명예도로명이다. 인동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인동 가마니 시장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양태석, 김노원, 장운심, 권학도 등의 청년들로, 그들은 가마니 더미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다가 주변 장꾼들에게도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삽시간에 장꾼들이 불어났고 주도자들은 행진대열을 짜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오후를 지나며 격렬해졌고, 시위대는 인동과 경찰서가 있는 원동을 지나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오후가 지나고, 용두동에 있는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 총격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15명이 사망, 9명이 체포되었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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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거리
박재혁(1895~1921)은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 채 붙잡혔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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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안내판
이광우(1825~1907)는 부산(釜山) 사람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초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열혈청년으로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울분을 금치 못하던 그는 1942년 5월 여경수(呂敬守) 등 5명의 동지들과 함께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당시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도발하면서 강제 공출, 징용 등으로 한국인에 대한 극악한 탄압을 더해가자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공장인 조선방직주식회사를 파괴할 것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집과 일제 군사요지 시설의 파괴도 추진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제작하여 공장 기숙사, 시장, 부두 등에 살포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노출되어 1943년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친일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불에 달군 화젓가락 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한 만행을 당한 후 검찰에 회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경수가 순국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5년 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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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공적비
항일독립운동공적비는 1942년 당시 성남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재학생이던 윤병운, 박원배, 박병양, 김덕균, 이학연, 이종복, 박병수, 박성호는 학생 독립단체인 신진당을 조직하여 만세운동과 일본총독 저격을 모의하고 후배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복역 중 어린 나이에 옥사하거나 출감 후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위 학생들의 공로를 기리어 윤병운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 박원배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박병양에게 199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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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윤용자 부부묘
지청천(1888~1957)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윤용자(1890~1964)는 지청천의 부인으로서, 1930년대 가족을 이끌면서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0년 6월에는 정정화(鄭靖和)·김병인(金秉仁)·이헌경(李憲卿)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여성 조직으로 1940년 6월 17일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요인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보육과 교육에 힘썼던 단체로 알려져 있다. 윤용자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남편 지청천, 아들 지달수(池達洙), 딸 지복영(池復榮)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헌신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지청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2017년 윤용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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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선 이의순 부부묘
오영선(1886~1939)은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의 사위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당시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경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 나자구(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경기도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20일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院)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다가 1921년 2월 24일 면직되었다. 1923년 10월에는 상해 거주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의 의원으로서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설립되어 임시정부 옹호파와 국민대표회의 개조파에서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員)을 선출할 때 위원으로 임명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4년 1월 12일부터 동년 12월까지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박은식(朴殷植)이 임시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을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서 동년 11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중국 동삼성 소재 항일독립운동단체의 분규를 수습 조정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총재인 손정도(孫貞道)가 2년동안 간도에 가 있을 때 총재 직무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안창호(安昌浩)의 주창에 의하여 조직된 임정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臨政經濟後援會 發起準備委員會)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하여 안공근(安恭根)회장과 함께 한국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면서 대동단결을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신임시약헌(新臨時約憲)이 공포되어 개각된 김구(金九) 국무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이동녕(李東寧)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외무부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4월에는 군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9월 사임하였다. 1931년 11월 6일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와병으로 인하여 결원처리된 후 1939년 3월 10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이의순(1895~1945)은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 이동휘(李東輝)의 차녀이며 남편은 상해지역의 독립운동가 오영선(吳永善)이다. 1902년경 부친이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할아버지 이발(李發), 언니 인순(仁橓) 등과 함께 7세의 나이에 서울로 이사와 성장했다. 1911년 가을, 서울을 떠나 성진(城津)에서 살다가 부친이 만주로 망명하자 부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하였다. 동년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민족학교인 명동학교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근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하여 이를 계기로 1919년 명동여학교를 병설하는 등, 간도지역 여성 민족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18년 가을에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이의순은 그곳 신한촌(新韓村)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이곳의 애국지사 채성하(蔡聖河)의 맏딸 채계복(蔡啓福)과 같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당시 회원은 50명이었다. 한편 이의순은 미래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부친이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이의순은 1920년 할아버지 이발과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오영선과 결혼하였다. 그 후 이동휘가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오게 될 무렵 이의순은 상해에 계속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11일 이의순은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斗奉)의 처 조봉원(趙奉元)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해한인부인회를 개조하여 보다 급진적인 조직인 상해한인여성동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상해지역 여성조직의 분열을 가져오는 점이 있어 김구(金九) 등의 중재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해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 땅에서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오영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이의순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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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박신일 부부묘
손정도(1881~1931)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 일대에 파견되어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독립운동 시위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동년 4월 10일, 11일 양일간에 걸쳐 이동녕 등 동지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개최하였다. 회의를 통해 그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이 무렵에 서울에서 소집된 국민대회에서는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한성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 체재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노오불에게 부탁하여 국내에서 모금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전달받기도 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 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3일에는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8월에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되어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8월에는 김 구·여운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에 뽑혀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의 알력이 심해짐에 따라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 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여 동년 2월에 재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시키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길림으로 돌아가 기독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워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3월 1일에는 이곳에서 양기탁(梁起鐸)·왕삼덕(王三德)·최 일(崔日)·박기백(朴起白) 등 동지들과 기념식을 갖고 앞으로의 독립문제와 실력양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주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고활신(高豁信)·오인화(吳仁華)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민족운동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병사하였다. 박신일(미상~1968)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손정도와 결혼했다. 손정도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같은 해 4월 13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손정도는 1922년까지 상하이에 머물며 국내 유지들로부터 모은 독립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 활동을 주도했다. 박신일은 이때 남편과 함께 상하이에 머물며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자신도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22년 손정도가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린으로 이동하자 박신일도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린에서 손정도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손정도는 자신의 교회를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와 손정도와 함께 독립투쟁 방법을 논의했다. 박신일은 남편을 찾아온 독립운동가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등 생활을 지원하고, 독립자금의 융통을 도왔다. 1931년 2월 19일 손정도가 병사한 후에도 박신일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손정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신일에게 202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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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이수명 부부묘
신팔균(1882~1924)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활약하다가 동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北京), 상해(上海), 서백리아(西伯利亞)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東三省)의 지도자로서 여 준(呂準)·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서 일(徐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敬天)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梁世奉)·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旺淸門二道溝)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東川)이라 하여 이청천(李靑天)·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었으나 아깝게 전사 순국하였다. 임수명(1894~1924)은 1912년 서울 모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을 알게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8월 1일(음) 신팔균이 통의부(統義府)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하는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신팔균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임수명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