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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운 추모비
김준운(1855~1925)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19년 4얼 6일 오후 1시경 영천군(永川郡) 신영면(新寧面) 완전동(莞田洞) 부근 냇가에서 신영공립보통학교(新寧公立普通學校) 생도 황정수(黃正秀)외 수십명에게 4월 8일 신영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니 참가하도록 규합하였고, 같은날 오후 9시경에 다시 왕산동(旺山洞) 예수교회를 방문하여 허석군(許石君)으로 하여금 신도들에게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할 것을 부탁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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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택 추모비
한상택(1909-1985)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대구농립학교 재학중인 1928년 2월에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에 가입하여 동결사의 조직연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적우동맹은 이 무렵 대구지역 학생들이 민족적 항일의식을 고양시키는 연구 모임 중에 하나로 1927년 말에 결성된 신우동맹(新友同盟) 및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계승한 것이다. 1928년 4월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맹휴로 인한 주동학생이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적우동맹도 관련 활동을 한 것이 발각되며 1828년 11월 한상택은 일경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1930년 3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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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용 추모비
권태용(1920-1986)은 1920년 4월 23일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 현 영천시) 신녕면(新寧面) 부산리(富山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집안 배경,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불교전문학교(佛敎專門學校) 출신인 것으로 보아 고등교육 이상은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1944년 1월 20일 대구24부대(대구80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는 민족의식 고조로 인한 독립운동 참여에 뛰어들게 되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 부대에 배치된 것은 1943년 10월 20일 일제가 조선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공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표면적으로 지원자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일제는 명사 가운데 친일 인사를 선발하여 각지를 돌며 징병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으며, 각 지역의 관헌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일가친척을 속이거나 입대하지 않으면 갖은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대구 24부대에 배치된 것은 경북 출신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부대에는 경상남북도 출신의 학병 600여 명이 끌려와 있었다. 학병 대다수는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학병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뜻을 가졌으며, 그 중심에는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출신 권혁조(權赫朝), 메이지학원(明治學園) 김이현(金而鉉),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출신 문한우(文漢雨)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부대에 있던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학병들은 집단 탈출 계획을 세웠다. 권중혁(權重赫)·김복현(金福鉉)과 함께 이들의 계획에 동참하였다. 이들과 함께 1944년 8월 7일 부대를 탈출하여 국외로 이주한 후 일본을 대상으로 독립 전쟁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한우가 탈출 이후 필요한 자금을 그의 부모님을 통해서 마련하였지만, 탈출 예정일에는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8월 8일 오후 9시 반, 부대 안에 있던 하수구로 탈출을 계획한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눈을 속이고, 당일 불침번이었던 허상도(許相燾)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에 성공하였다.대구24부대를 탈출하자 당초 지리산을 통해서 국외로 간다는 계획은 수정하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일본군에게 체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근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팔공산에 들어간 후 진불암(眞佛庵)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은 불교전문학교 출신으로 진불암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주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학병들이 집단 탈출한 사실을 알게 된 24부대는 경찰, 경방단(警防團), 면서기 등을 총동원하여 팔공산을 포위하였다. 이를 감지한 탈출 학병들은 개별적으로 팔공산을 탈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문학우와 권혁조는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권중혁과 함께 신녕(新寧) 뒷산에 숨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2월 15일 군사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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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추모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못한 유림(儒林) 인사들은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을 중심으로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게 하기 위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제출하였는데 그는 137인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에 함경북도 지방에 돌아와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윤태선(尹台善)·이상호(李相鎬)·전재일(全在一) 등 수십명의 조직원과 함께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서 이 탁(李 )·지청천(池靑天)·김이대(金履大) 등이 조직한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그는 1926년 4월부터 정의부 검무감(檢務監) 고인섭(高仁燮)과 함께 봉천(奉天), 개원(開原)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일경의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7년 2월 12일에 개원성 동문밖에서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1927년 12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43년에 함경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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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구 공적기념비
조용구(1861 - 1925)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07년 7월 이강년(李康秊)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좌종사부(坐從事部) 의관(議官)으로 선임되어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 까지청〔鵲城〕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종군(從軍)하였다. 그 이후에는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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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공적기념비
조윤제(1904 - 1976)는 1924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창설되자 제1회생으로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으며, 1929년 3월에 동 학부를 졸업,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다. 이어 동 학부의 촉탁(囑託)·조수를 거쳐 1932년 3월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 일제 때, 중등학교의 교원)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4월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경성사범학교를 사임, 자유의 몸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이던 손진태(孫晉泰), 뒤이어 대학 후배인 이인영(李仁榮)과 모여 학문 연구방법론을 토론하고, 그 결과 민족사관의 입장을 밝혔다. 그 뒤 경신학교·양정중학교·동성상업학교·천주교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1945년 8월 조국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어 동 대학의 법문학부장, 개편된 서울대학교의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71세 때인 1974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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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탑
독립선언서탑에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오늘날 전해오는 국내외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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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면 3.18독립운동기념관
운문면 3·18 독립운동 기념관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700-6번지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슬래브 기와를 이은 지상 1층 건물이다. 연면적 114㎡로 2001년 10월 착공하여 2002년 7월 25일 건립되었다. 내부의 전시물은 민족의 수난 시대, 운문면의 3·1 운동, 청도의 애국지사들의 독립 항쟁, 3·1 운동의 역사적 의의, 청도 독립운동 발생 지역 등 5개 영역에 걸쳐 각 영역에 맞는 다양한 패널을 제작 게시하고 있다. 또한 영상 홍보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관람객들에게 상영한다. 운문면 3.18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상구, 김종대가 당시 사립 문명 학교장 김우곤의 집에서 동지 여러 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만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3월 18일 정보를 접수한 일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 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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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흉상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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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상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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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의 항일투쟁실록비
곽종의(1879-1960)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셨던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자는 성강이다. 곽종의 지사는 고령군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장년기를 모두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大正, 다이쇼,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였다.)을 가살(可殺: 카코로시, 또는 카사츠, 살인을 한다는 의미)이라 부른다는 풍문이 있다고 발설하였는데, 그러한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일제 총독부가 담배에 대한 생산과 경작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이신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뱃대를 즉석에서 꺾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또 전매청 직원이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신발을 신은 집 안까지 들어와 뒤지자 화가 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에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나와서 연장자께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 것에 화가 난 조카 곽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 때 고령경찰서는 마을을 모두 포위하여 곽종의 지사와 지사의 아들, 곽태진 선생, 그리고 조카 곽태철 선생을 비롯한 곽씨 일문이 모두 항일가문이라 하여 수십명을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또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한편으로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대하여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늘 곽종의 지사를 시찰이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들 곽태진 선생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부자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십일 동안 취조를 당하였다. 이 때 古川(후루카와) 서장이 직접 면담을 하였는데,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느냐고 물었고 지사가 어느 나라이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서장이 화가 나 석방시키지 않고 구류해버린다. 이후 종전이 된 후에 석방되었으며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고 한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있는 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로 추기비는 선생의 이러한 항일투쟁 정신을 기록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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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의 투쟁실록 추기비
곽종의(1879-1960)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셨던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자는 성강이다. 곽종의 지사는 고령군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장년기를 모두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大正, 다이쇼,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였다.)을 가살(可殺: 카코로시, 또는 카사츠, 살인을 한다는 의미)이라 부른다는 풍문이 있다고 발설하였는데, 그러한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일제 총독부가 담배에 대한 생산과 경작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이신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뱃대를 즉석에서 꺾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또 전매청 직원이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신발을 신은 집 안까지 들어와 뒤지자 화가 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에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나와서 연장자께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 것에 화가 난 조카 곽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 때 고령경찰서는 마을을 모두 포위하여 곽종의 지사와 지사의 아들, 곽태진 선생, 그리고 조카 곽태철 선생을 비롯한 곽씨 일문이 모두 항일가문이라 하여 수십명을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또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한편으로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대하여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늘 곽종의 지사를 시찰이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들 곽태진 선생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부자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십일 동안 취조를 당하였다. 이 때 古川(후루카와) 서장이 직접 면담을 하였는데,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느냐고 물었고 지사가 어느 나라이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서장이 화가 나 석방시키지 않고 구류해버린다. 이후 종전이 된 후에 석방되었으며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고 한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있는 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로 추기비는 선생의 이러한 항일투쟁 정신을 기록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