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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익봉 독립운동현창비
하익봉(1926~1945)은 1943년경 경남 진주군 진주공립중학교 재학 중 박노근(朴魯瑾), 김상훈(金相勳), 강필진(姜必鎭) 등과 광명회(光明會)를 조직하였다. 광명회는 독서써클로 우리 역사를 공부, 토론하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단체였다. 이들은 평소 절친한 친구 사이로, 특히 박노근의 아버지와 하익봉의 삼촌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졸업 후에는 모두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중 하익봉은 1944년 9월 진주공립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해비행장 건설공사 현장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천막으로 지은 막사에서 공동숙식을 하며 온갖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익봉은 학생들에게 우리말 사용을 생활화할 것과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다가 9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하익봉은 진해헌병대 영내에서 약 40일 동안 구금된 체 학교 내외에 퍼져 있는 항일운동과 조선독립을 위한 써클활동의 사실유무 등의 자백을 강요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44년 11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용트럭편으로 부산지검에 송치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고문의 후휴증으로 1945년 4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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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호서당(이수안 사당)
매호서당(梅湖書堂)은 이수안의 학식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1977년에 옛날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제자들이 이수안 선생의 유풍을 기리기 위해 마호(麻湖)의 옛 유지에 매호서당(梅湖書堂)을 건립하고 매년 중춘(仲春)에 차례를 거행하며 그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수안(1859 - 1929)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직접 가지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수안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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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호 묘
성경호(1854~1896)의 휘는 경호, 자는 화진, 호는 회천이다. 1896년 1월 경남 진양의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던 중 안의에서 기의(起義)한 노응규(盧應奎)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참모(參謀)로 선임되었다. 그는 노응규를 비롯하여 서재기(徐再基)·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임경희(林景熙) 등과 함께 진주(晋州)로 들어가 관찰부를 공략하여 적을 처단하였다. 그 후 부산(釜山) 일본인 거류지역 습격을 계획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군의 반격으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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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 공적비
김용익(1886~1970)은 1921년 9월경 경남 산청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용익은 진주 3·1운동 때 홍종석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 도주하여 산속에서 은신하였다. 이때 권총을 입수하였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나섰다. 동년 9월 20일 오후 5시경 동군(同郡) 단성면(丹城面) 소남리(召南里) 조현용(趙顯溶)의 집에 들어가 그에게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이라 칭하고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 동월 23일 오후 5시경 동군 도산면(都山面) 장죽리(長竹里) 이원규(李源奎)의 집에 가서 같은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동월 28일 오후 6시경 동군 생비량면(生比良面) 가종리(可淙里)에 나타나 동면 주재소 순사 정안찬(鄭安贊)을 응징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김용익은 일경에 체포되어 1932년 3월 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6년을 받았으나, 곧 징역 4년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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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추모비(제갑석, 강찬영)
제갑석(1892~1919)과 강찬영(1865~1940)은 1919년 3월 25일 문산면 소문리(文山面蘇文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 수천 매를 작성하여 이날 소문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체포된 후, 제갑석은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석에 있다가 같은 해 6월 13일 순국하였다. 한편, 강찬영은 1921년 2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두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제갑석에게 1991년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강찬영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본 애국지사 추모비는 문산면 소문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두 애국지사의 영령을 추모하고자 1979년에 3.1만세운동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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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권 묘
김윤권(1876~1944)은 진양군 미천면(美川面)에 사는 곽복금(郭福金)의 집에서 박봉제(朴奉濟) 등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의우회(獨立義友會)를 조직하여 감찰부서를 책임 맡았다. 1919년 3월 20일 이들은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약속장소인 동매(東梅)에 모여 군중들을 규합, 시위행진을 전개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에 시위가 중단되고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6월 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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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진주시 남성동)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이강우·김재화·권채근·강달룡·박진환·박용근 등의 사전 준비로 3만여 명이 모여 경남 도청 앞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에도 읍내 상점은 모두 철시하고 태극기와 악대까지 앞세워 만세시위를 하여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위에서 강달룡 외 13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구국정신과 희생을 기념하고자 1971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부에 본 비가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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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미독립만세의거 기념 종탑
진주 3·1운동은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다. 고종 장례를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박대업 등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뒤 진주로 돌아오면서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진주로 몰래 반입하여 김재화 집에서 여러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거사 계획을 하였다. 진주 장날인 3월 18일 정오가 되자 진주교회의 종이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하자 이를 신호로 중앙시장, 촉석루 입구, 재판소 앞, 봉곡동, 칠암동 강변 등 5곳에서 만세시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진주 3.1운동은 1919년 3월 18일부터 일주일간 계속된 시위투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2년 종탑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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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학교(배돈병원)
이곳은 진주지역 최초의 사립학교 '광림학교'와 경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배돈병원'이 있었던 자리이다. 학교와 병원은 1905년 진주교회를 설립한 호주 의료 선교사 커를(Currell. H)부부가 세웠다. 학교는 1906년에 남.여 두 학교로 개교되었다가 1909년 통합되어 수정동 43번지에 '광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29년에 재정문제로 폐지되고, 여자부는 시원여학교(柴園學校)라는 이름으로 계속 운영되었으나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39년에 폐교되었다. 광림학교는 근대 초등교육을 통해 어린이와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권익성장에 기여했다. 또한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 3월 18일 진주 기미독립만세의거(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배돈병원'은 1913년 봉래동 36번지에 세워져 지역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으며 주민들의 보건복지와 지역사회 의료 근대화에 기여했다. 그러다가 1941년 일제가 외국선교사를 모두 추방하여 병원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6.25전쟁으로 병원이 파괴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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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관 묘
장두관(1899~1958)의 이명으로는 장두남이 있다. 1919년 고향인 진주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년 6월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청산리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독립군과 행동을 같이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1924년에는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들어와서 진주(晋州)금융조합에 근무하는 박춘성(朴春星)으로 하여금 조합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토록 하여 만주로 가져가던 도중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중앙위원 겸 진주지회 위원장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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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서당(하겸진 사당)
덕곡서당은 회봉 하겸진선생이 문도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선생께서는 처음 구강정사龜岡精舍라는 곳에 있었지만 정사가 너무 좁아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들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과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지명에 따라 덕곡서당이라 이름 하였고. 서당의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이다. 1957년부터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의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 매년 하겸진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덕곡서당 우측으로는 하겸진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다. 하겸진(1860 - 1946)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이후 1926년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과 군사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그는 김창숙의 활동을 지원하던 중 1927년 2월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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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덕곡마을)
파리장서비는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덕곡마을 덕곡서당 앞에 위치해 있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5월 산청 출신의 면우 곽종석(1864∼1919) 등 137명의 전국 유림 대표가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강화 회의에 보낸 독립운동이다. 파리장서비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하며 서명한 유림의 이름을 새긴 비를 말한다. 진주에서는 수곡의 회봉 하겸진, 백촌 하봉수, 대곡의 매당 이수안 등이 참여했다. 수곡 출신의 하겸진은 파리장서운동을 최일선에서 이끈 산청 곽종석의 제자였다. 하겸진은 함께 수학한 하봉수 등과 수곡 낙수암에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