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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한 이들의 기념비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독립운동한 이들의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중순, 최범술, 송지환, 송수완, 박또살동, 송찬홍, 송용수, 신영범, 임응주는 사천 일대의 사람들과 조국 독립선언서를 읽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위의 8명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구타당하고 형을 당하였다. 그중 6명이 향년을 다 못하고 사망하였다. 위의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념하고 길이 기리고자 1968년 광복절에 위 비를 건립하였다. 위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한용운이 조직한 불교계 비밀결사 조직인 만당에서 독립운동에 몸 바친 최범술이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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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성 묘
신두성(1890~1959)은 경상남도 동래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長安面) 좌천리(佐川里) 시장에서 김윤희, 정지모 등과 함께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5백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천리시장으로부터 울산(蔚山)으로 통하는 거리까지 시위행진 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받고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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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파리장서비)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이다.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의 사적명은 한국유림파리장서비였고,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4-5 남사예담촌 광장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 사적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배포한 유림들의 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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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집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 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 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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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독립기념관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유림독립기념관이다. 본 기념관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배포한 유림들의 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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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산청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이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때를 같이 하여 산청, 단성, 신등, 신안 등지에서도 3월 21일 도내 장날에 수천 군중이 거사하였다. 본 비는 그때 순국한 선열을 비롯하여 항일 독립투쟁에 옥고를 치른 수많은 애국지사와 무명의 순국선열을 기리고자 1995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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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호 묘
민용호(1869 - 1922)는 경기도 여주(驪州)의 청년 문사(文士)로서 1차 의병전쟁 때 경기도 일대에서 거의하였으나, 후에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 9군 도창의소(關東 九郡 都倡義所) 의병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이다. 그는 고향 경기도 지역에서 여러 의병진과의 합동 작전을 피하고, 산악지대인 관동 방면으로 나가서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여주를 떠나 원주를 들러 평창,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활동하였다. 안승우 의병장은 군사를 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민용호 의병장은 관동 지방의 병력을 모으고, 각자 활동하여 활로를 넓히고 보급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민용호는 강릉 지방에서 의병 세력을 확장하고, 산악 지역의 포수 등 병력을 충원하며 관북 지방 진출을 기도하였다. 강릉에서 원산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곳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침략기지를 구축한 일본 세력을 노렸지만 일본군에 정보가 노출되었다. 결국 원산 공략은 실패하였고 강원 지역에서 세력을 도모하던 중 민간의 부담이 강해지고 관군의 공격마저 이어지며 점차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의병의 중심이었던 제천 및 영남 의병이 무너지며 관동 의병도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2차 원산 공략의 실패 후 민용호 의진은 산악 지역을 따라 황해도로 이동했으나 관군은 지속적으로 추격해 왔고 함흥으로 피신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자 민용호는 병력을 보충한 뒤 만주로 건너가며 의진을 해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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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안 묘
이수안 선생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수안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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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의의병장 전투지 대원사
대원사는 박동의 의병장의 전투지이다. 박동의는 경남 산청(山淸) 출신으로 1908년 8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던 의병장이다. 1908년 6월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를 습격하는 등 동년 10월까지 경남 산천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각처에서 결성된 의병부대의 활동이 왕성하게 나타났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대인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항전하였던 의병부대는 고광순의진(高光洵義陣),김태원의진(金泰元義陣),김동신의진(金東臣義陣),문태서의진(文泰瑞義陣) 등이었다. 1908년 2월 7일 일본군 수비대는 총 85명으로 편성된 소위 '지리산토벌대(智異山討伐隊)'를 편성하여 동년 3월 5일까지 여러 전투에서 많은 의병을 해산시켰다. 그후 지리산 일대에는 이석용의진(李錫庸義陣),이장춘의진(李長春義陣),윤영수의진(尹永壽義陣),장가하의진(張佳夏義陣),박동의의진(朴東義義陣) 등이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년 창의한 박동의의진은 경남 산청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 윤수영의 휘하에서 대장 송가(宋哥)와 대장 손우식(孫佑植) 등과 함께 항전하였다. 박동의의진의 편제는 경남창의대장(慶南倡義大將) 박동(朴東義)의 이하 후군장 장○만(張○滿),중대장 황내청(黃乃靑),도선봉 이학노(李學魯),좌선봉 이만영(李萬永),중군장 양문칠(梁文七),영솔장 김경삼(金敬三),후군장 유명국(柳明國)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8년 6월 11일 박동의가 거느린 의병 약 80여 명은 전북 운봉군(雲峰郡)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를 공격하였으며, 동년 8월 26일 박동의가 거느리고 있는 의병 약 30명은 지리산 남쪽 기슭에서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토벌대 11명과 교전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13일 박동의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박동의의진은 운봉,하동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동년 10월 17일 산청군 덕산(德山)에 주둔하고 있던 박동의는 진주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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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 발상기념비
천도교 진주시교구는 1894년 4월(음력) 초순께 시천면 내대리에서 백낙도 대접주(大接主. 동학농민혁명의 대단위 조직인 포의 책임자)를 중심으로 500여 명의 동학농민들이 봉기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백낙도 대접주는 보름여 만에 관군에 체포돼 참형을 당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의령, 사천, 고성, 남해, 함안, 진주 등 서부 경남지역으로 확산했다. 주탑은 천지인(天地人) 3단으로 하늘과 땅, 사람이 우주와 일체임을 형상화했다. 좌우 보조 탑의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은 당시 농민 혁명군의 슬로건이다. 높이는 1894㎜로 1894년 봉기한 것을 상징했다. 뒷쪽 원기둥은 동학농민혁명과 조선 정부에 대한 폐정개혁 12개조를, 주탑의 횃불 모양은 내대리에서 동학농민 횃불이 오른 것을 각각 형상화했다. 2010(포덕 151)년 11월 13일 천도교 진주시교구 주관으로 실시한 진주지역 인내천 강좌를 계기로 이곳 내대리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하였고, 이후 천도교 진주.사천.삼천포.고성.통영교구 등 경상도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추모식 및 합동시일예식을 매년 봉헌하였다. 2014(포덕 155)년 9월 학술 강연회를 개최하여 이곳 내대리가 영남지역 최초의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임을 확인하고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촉하였다. 추진위원들의 정성과 산청군의 지원으로 2015(포덕 156)년 10월 20일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발상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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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기념비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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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충렬사
양산 충렬사는 양산시 교동 157-11에 위치하며, 양산의 삼조의열을 비롯 임진왜란 공신 및 항일 독립유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건립되었다 훼손된 것을 2012년 재건립하였다.충렬사는 양산 정신의 근간인 삼조의열 3위를 비롯해 임란공신 28위, 항일독립운동유공자 39위의 충혼을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됐다 훼철된 것을 2012년 장소를 달리하고 규모를 키워 새롭게 건립하였다. 옛 충렬사는 임란공신 조영규(趙英圭) 공과 백수회(白受繪) 공을 향사하고자 1696년(숙종 22) 양산 읍성 내의 동헌 남쪽에 건립됐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등의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삼조의열은 신라 때 삽량주간이었던 만고 충신 박제상(朴堤上) 공, 고려 때 양주방어사였던 김원현(金元鉉) 공, 조선 임진왜란 때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 공을 일컫는다. 이들의 비석이 양산 읍성 내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피란 신세를 겪었고, 광복 후 지역 원로들이 조성한 춘추원 장충단(奬忠壇)에 모셔져 오다 이 곳 새 충렬사 내로 옮겨졌다. 또한 임란공신과 항일독립유공자들도 이 곳에 함께 모시게 됨으로써 흩어진 양산 선각자들의 혼령을 한 곳에서 모시고 길이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