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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묘
1919년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長有面茂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김승태(1878-1940)의 이명은 김시여(金時汝)이다. 4월 11일 김종훤·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자기 동리사람들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4월 12일, 김승태는 선두에 서서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행진하였다.일경은 무력행사를 통해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시위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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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호 기적비
최현호(1890-1974)는 1919년 4월 11일, 김종훤, 조순규(趙順奎), 이강석(李康奭), 김승태(金升泰)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튿날인 4월 12일, 최현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자,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습격하였다.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최현호는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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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읍 기미년 독립만세의거 기념비
진영읍 기미년 독립만세의거 기념비는 경남 김해에 있으며, 기미년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9년 세워진 비이다. 1차 진영의거는 김정태, 김용환, 김우현, 김성도가 3월 30일 각자 소지금을 추렴한 후, 김정태에게 "대형 태극기"와 "독립만세" 전단지를 제작해 장날인 다음 날 3월 31일 오후 1시, 태극기와 격문을 날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2차 진영의거에 안기호, 김종만 지사는 수차례 읍민들을 선동하여 4월 5일 서당 학생 30여명과 합세하여 태극기와 대장기를 흔들며 의병처럼 봉기하여 진영 장터로 돌진하였고, 김용호는 맨손과 몽둥이로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웠으나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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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대 묘
안창대(1908-1943)의 이명은 안철부(安哲夫), 김능선(金能善)이다. 1933·1934년 서울에서 협동조합(協同組合)을 결성하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항일의식 및 계급의식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었다. 1935년 6월부터 최성호(崔成浩) 등과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일제 식민지지배를 반대하는 활동을 펴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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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 묘
소눌 노상직(1855-1931)은 일제강점기 파리장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로서 영남 지역의 이름 있는 유학자이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노상직은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거부하여 영남루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파리장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을 대표로 유림의 대표들이 서명한 서한이다. 이 일로 노상직 선생은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이후 중국 만주로 2년여 망명하였으며 독립군의 군자금 모집 등에 역할을 하였다. 1913년 밀양으로 돌아온 노상직 선생은 사연서당(泗淵書堂), 자암서당(紫巖書堂) 등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집중하였다. 영남 지역의 유학자 중에서도 성호 이익의 학통을 따르는 실학자였으며 노상직 선생이 남긴 여러 저서 중에 소눌문집 책판은 경남유형문화재 제 176호로 지정되어 밀양시립박물관 목판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193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저술한 문집은 48권 25책에 이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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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 묘
노상익(1849 - 1941)은 김해 생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대눌은 1882년(고종 19년) 34세에 문과별시을과에서 제일인자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를 제수하며 벼슬길에 나갔다. 1905년 홍문관시강을 제수했으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물러났다. 홍문관의 경연이 유야무야 되는 것을 본 대눌은 나라의 봉록을 돌려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홍문관의 경연을 폐지하지 말 것”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졌다. 일본은 그해 11월에 일본천황의 ‘은사금’을 조선의 주요인물들에게 내렸다. 밀양헌병대 소장 여송치가 대눌을 찾아와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므로 천황께서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매국노들이 받아먹는 것이지 망국의 대부가 어찌 이에 관여할 것인가. 만약에 다시 강요한다면 죽을 뿐이다.”라며 거절하였다. 대눌은 이듬해 63세로 일본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조국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렇게 압록강을 건너 망명한 대눌은 만주 서간도 지역의 안동현 근처 접리수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그 후 안효제·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안둥현 접리수(接梨樹) 서구(西溝)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에 노력하였다. 특히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활동에 힘써 한국 영토와 문화 관련 다수의 저작을 집필하였다. 노상익이 집필한 저술로는 『통사절요(通史節要)』·『동역고(東域考)』·『동제고략(東制考略)』 등이 있다. 1913년 11월 한인공교회 창립 등에 참여하면서 주요 한인들과 교류하고 이를 통해 독립의지 고양과 민족문화 확립에 노력하기도 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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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항일독립운동 표지석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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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호 묘
하준호(1887 ~1942)는 경상남도 남해(南海)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하준호는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하자, 고현면(古縣面) 면장 김치관은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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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3.1운동기념비
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는 경남 남해에 위치해있으며, 남해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68년 3월에 세워진 비이다.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는 뒷면에는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비문이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남해의 독립유공자 2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남해에서는 2일에 설천면 남양에서 비롯되었고 4일에는 읍내를 중심으로 전군에 일제히 일어났다. 2003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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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모 묘
이예모(1883-1954)는 4월 2일 하동(河東)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가지고 귀향하여, 이날 정순조(鄭順祚)·정학순(鄭學淳)·정몽호(鄭夢虎)·윤주순(尹柱舜) 등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인근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해주고,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권유하였다. 4월 3일 오후 3시경, 많은 시위군중의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으며,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았으며, 면장 김치관이 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한 사실을 안 시위군중은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후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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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림 순교비
최상림(1888-1945)은 경상남도 동래 사람으로, 당시 부산 해운대교회의 목사였다. 1938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에 붙잡혀 동래경찰서에 구금당했고, 1938년 9월 10일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여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1940년 6월, 일경에 붙잡혀 사천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41년 3월에는 부산으로 압송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예심이 진행되던 중, 일경에게 받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4월 30일 병보석되었으나 7일 만인 5월 6일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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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호 공적 안내판
윤병호(1889-1974)는 경상남도 남해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에 안희제, 남형우, 서상일, 이원식,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3.1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白山商會, 뒤에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개편)의 지배인 겸 취체역(取締役, 주식회사의 이사)이 되어 실질적으로 이 회사를 관리하였다. 이 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 기관이었다. 1919년 11월에는 애국청년들을 민족간부로 양성하기 위하여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조선어학회의 전신)가 조선어사전 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 정책을 대대적으로 강행하고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