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TOTAL. 181 건
동학농민혁명 유적 백두대간 표지석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11월 중순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전투를 벌렸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 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의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운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쪽뚤 표지석
쪽뚤은 1894년 11월 13일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전투였던 방아치 전투와 여원치 전투에서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진을 쳤던 곳이다. 남원의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의 민보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으로 그것을 기념하여 현재 비를 세워두고 있다.기념비의 정면에는 쪽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측면 오른쪽에는 현위치와 농민군이 깃발을 내걸었던 깃대바위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도가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유물 깃대바위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쪽둘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하던 과정 중에 주둔지 위쪽에 승전 결의와 표식을 위헤 깃발을 꽂은 곳이다. 이 바위에 두개의 홈을 파서 깃대를 세웠다고 한다. 농민군이 이곳에 주준한 목적은 방아치와 여원치의 두가지 공격로를 두고 민보군에게 혼선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시풍 불망비
김시풍(미상 - 1894)은 개항기 전주감영영장을 역임한 무신이다. 전라북도 전주 출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60세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으로 전주감영의 영장(營將)으로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洪啓薰)이 5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의논, 전주성내에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 등과 같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15일 목이 잘려, 16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金永培)·김용하(金用夏)·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남원부 관아 터
남원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1861년 경주로부터 피신해 오시어 교룡산의 은적암에 약 반년 동안 은거하시며 논학문(일명 동학론)등 동경대전의 주요 경전을 집필하시며 포교하셨던 동학의 성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장군이 음력 6월 하순에 무혈입성하여 북으로는 금산, 진산에서 부터 남으로는 순천, 광양까지를 관장하는 전라좌도 대도회소와 전라좌도 대집강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관장했는데 그 자리가 여기 남원부 관아 터이다. 7월 중순에는 7만여명의 농민군이 운집하여 남원대회를 열었으며 김개남장군이 정병을 이끌고 북상한 뒤에 남은 농민군이 운봉을 공격하려다가 방아치전투에서 수천 명이 순절하였고 이어서 남원성전투에서 민보군에게 패전하여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후 일본군이 진주아여 많은 백성을 살상하고 방화하는 참상을 겪었으나 살아남은 농님군은 신간회, 3.1운동 등의 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산)
부안 백산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을 가르는 대사건으로 평가받는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은 1893년 11울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고, 이듬해(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 이후 무장기포를 거쳐 1894년 3월 26일(양력 5월 1일), 호남일대에서 모인 구눙이 야트막한 백산에 집결하였다. 그 수는 전라도 34개 지역에서 모인 8천여 명으로 전하는데, 이를 두고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이라고 하였다. 백산에 모인 군중은 지휘부를 비롯한 혁명군을 조직하고, 봉기의 대의와 지향하는 바를 밝힌 '백산 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군율'을 선포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백산을 택한것은 '백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라는 비결이 전하는 길지라는 점, 군량확보가 용이한 곡창지대라는 점, 전략적 용충지일 뿐 아니라 사통팔당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1894년 당시 고부 백산이 1914년 일본강점기에 부안 백산이 되면서 한때 백산대회는 잊혔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기념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9월 17일 국가문화재 사적 제409호로 승격되었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조선 시대 공개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집행하였다. 중한죄를 지으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하는 것[不待時斬]'과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한다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부안에서의 공개 처형은 부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 즉 부안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라 부르는 남문 밖이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으로, 1894년 12월 29일(음력) 정부군의 총살로 순국하였다. 이듬해(1895) 1월 12일에는 주산면 홍해 마을의 박문표(朴文表), 도산 마을의 김봉보(金奉甫), 그리고 송성구(宋成九)가 남문 밖에서 순국하였다. 한 달 뒤 2월 12일에는 남문 밖에서 9명이 순국하였고, 열흘 뒤 22일에는 7명이 순국하였는데, 장소는 무론 이름마저 알 수 없다.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던 김석윤(金錫允.김영조)이 순국한 것은 3월 18일이지만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순국한 부안 사람으로 확인된 숫자는 22명이지만,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명은 신원조차 알 수 없다. 12명의 순국 장소는 남문 밖으로 전하지만, 이외는 장소마저 알 수 없다. 이와 함께 부안 읍성의 동문 밖에서도 처형이 자행되었으며, 전남 나주로 끌려간 30여 명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관아 터)
조선 시대 부안 관아는 현감이 사무를 보는 동헌[東軒.패훈당(佩訓堂)]이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에, 그 서쪽에는 현감의 숙소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관아 출입문으로 2층의 진석루(鎭石樓)가 있었고, 그 앞 좌측 너럭바위에 <주림옥천(珠林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의 여덟 글자가 새겨 있었다. 지금의 부안군청 자리에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부르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 백산대회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부안읍 모산리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합류하여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먼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라 감영에서 부안 현감에게 지시하여 모집한 장정(壯丁)들을 해산시켰다. 그 뒤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 관아에 머물렀으며, 관아 뒤편에 있는 성황산에 주둔하였다. 부안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4월 7일[양력 5.11] 황토현 전투의 주력군으로 참여하여 승리하였고, 황토현 전승일은 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관아는 동학농민군과 관원이 공존하며 질서를 유지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첫 집결지)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민중은 3월 20일에 무장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확대한 후 3월 23일에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3월 26일(양력 5월 1일)에 백산대회를 개최하여 지휘부와 혁명군을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였다.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이곳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분토동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내걸었으며,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 고을 이름을 쓴 작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부안 관아에 편지를 보내 시장(市場)에서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分錢收稅]하는 것을 금지할 것 등 4개 조의 고치기 힘든 폐단[弊瘼]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전라 감영으로 보내기 위해서 부안현에서 모은 장정(壯丁)을 해산시키며 "지금 이들 장정을 모은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에 종사하라."라고 하였다. 일부는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처럼 분토동과 분포재는 부안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집결한 역사의 현장이다. 부안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한 이곳 분토동은 부안김씨 직장공파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분포재는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은 김보칠(金甫漆)의 재실이다. 편액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썼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김낙철과 쟁갈마을)
부안 동학의 대접주이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였던 김낙철(金洛喆)의 본관은 부안, 자는 여중(汝仲), 도호는 용암(龍庵)이다. 1858년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쟁갈 마을에서 태어났다. 쟁갈 마을은 안쟁가리.용성리.새멀,송학동 등 4개로 형성되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십 명의 하인을 거느린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동생 낙봉과 함께 1890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의 포교로 부안의 동학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김낙철은 1893년 교조 최제우의 사면복권과 동학을 공인받으려는 교조신원운동으로 전개된 광화문 복합 상소와 보은집회 당시, 전라도 책임자로 도도집(都都執)을 맡았다. 고부봉기 이후에는 도소를 설치하여 부안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도민이 부안에서 식량을 구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아사(餓死)를 면하게 되었다. 김낙철은 2차 봉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기병 묘
김기병(1831 - 1895)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탄생,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고 국내적으로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 앞들에서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줄포 세고 터)
줄포는 서족으로 칠산바다, 동쪽으로 고부평야, 그리고 북쪽으로 변산반도를 끼고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를 갖추고 있으며, 무장과 흥덕에서 고부와 한양으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로 인해 서해안 일대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로 고려시대에는 안흥창(安興倉), 조선시대에는 고부군 서창(西倉) 또는 부안헌의 남창(南倉)이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 줄포는 제주도에서 진도, 법성포, 줄포로, 군산포를 거쳐 한양의 마포나루로 이어지는 서남해 연안 항로를 연결하는 경제활동의 중심 항구였다. 일본강점기에는 전북지역에서 생산한 쌀의 일본 수출 항구로 가능하며, 서해의 4대 항구(제물포, 군산, 줄포, 목포)로 성황을 이루었다. 고부봉기 이후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던 지도부는 1894년 3월 1일[양력 4. 6], 줄포 세고를 점령한 뒤 군량(軍糧)을 확보하였고, 3월 10일에는 인근의 사냥꾼에게서 총기(銃器)를 거두어 들였다. 고부를 떠나 무장으로 이동한 후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이 고창과 흥덕을 거쳐 3월 23일[양력 4. 28] 줄포 사정(射亭)에 와서 머무른 후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