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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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지석
이 곳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1888년경 대접주 손화중과 근동에 세거해 온 천안 전씨 종친들과 연루된 전봉준 장군은 동지를 규합 이곳 당산골에서 농민군을 양성해오던 차 1894년 1월 10일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고부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마침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밝히는 무장포고문을 발표, 흥덕을 거쳐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25일 백산성에 총집결하는 대장정을 이른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갑오농민혁명의 제 1차 봉기가 일어난 발상지인 이 곳 고창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 곳에서 창의 포고문이 발표되었으며, 기념탑은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 혁명의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하였으며, 포고문을 선포하는 모습을 담아내었다. 탑 본문에는 기의의 목적을 담아낸 포고문을 새겼다. 이 기념탑은 2002년 고창군 및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건립하였다.
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은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인 이 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 고창의 손화중 (남접) 대접주는 이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 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 10일 공음년 구수내 송문수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 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時機尙早)를 말하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 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고부 농민봉기 이후 전봉준은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都率大將)으로 한 농민군은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등을 띄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고창주 추모비
고창주(1858~189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 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1894년 당시 아들 고광철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장성 황룡촌, 전주성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2차 농민봉기에도 참가했다 전봉준 및 손화중 등의 농민군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 압송되었는데, 1895년 3월 재판을 받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중 정읍에서 지방 유지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금 체포된 뒤 3월 27일 총살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1994년 5월 고창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 의해 동학 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세워졌으며, 고창주 의병장을 기리고 있다.
고창무장동학농민혁명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기포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1894년 3월 20일경에 재봉기하면서 밝힌 무장포고문에는 봉기의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 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의병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학농민군 진격로(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를 따라 세워진 안내판으로 <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라도 무장현(현 고창) 선운산 도솔암 남쪽에 충암절벽의 불상 속에 비결이 들어있고,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동학 손화중의 접중에서 이 비기를 손에 넣어 사람을 끌어모으고 농민혁명을 일으켰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군 진격로(전봉준 장군 유시)
이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에는 전봉준 장군 유시(遺詩)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봉준 장군은 공주 우금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뒤 논산, 구미란, 그리고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동지 몇명과 함께 11월 29일 (갑오년) 입암산성 (정읍시 입암면)으로 들어가 밤을 지새고, 다음날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지난날 친구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 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로 이웃에 살고있는 한신현에게 밀고했고,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뜻하지 않은 위기에 놓이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몽둥이로 다리를 얻어 맞고 붙잡히고 만다. 전봉준에겐 이미 현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1895년 (을미년) 3월 10일 등 5차례에 걸쳐 일본영사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에 "나는 바른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역율(逆律: 반역죄)을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결국 1895년 3월 29일 사형선고를 받고,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다음날인 3월 30일 새벽 2시 교형(刑)이 집행되었다.
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진격로 안내판은 고창 무장읍성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감영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남으로 내려와 정읍 흥덕을 거쳐 8일 석양에 고창으로 진주하여 먼저 옥문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혀 있는 동학교인 7명을 석방시켰다. 동헌과 아사를 부수고 들어가 인부를 접수하여하였으나 이미 현감이 도피한 후였고 군기와 장적을 압구하고 동부에 있는 은대정(제주도 대정 현감을 지낸 은수룡)의 집으로 몰려가 가산을 부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신시(오후 4시전후)에 농민군 일만여명은 무장읍내로 들어가 옥중의 동학교인 44명을 석방하고 성내외 7거리 인가에 방화하니 화염이 충천하였다. 무장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3일동안 머물면서 황토현싸움 이래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이미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 초토사가 거느리는 경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읍에서 5리쯤 떨어진 여시뫼봉에 진을 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동학농민군 진격로(호산봉과 1차 봉기 모의지)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호산봉(여시뫼봉)과 1차 봉기 모의지에 대한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산봉은 순 우리말로 여시뫼봉이다. 또는 왕재산이라고도 한다. 호산봉에서 보면 낮은 산 같지만 반대편은 지대가 낮아 산이 높아 보이고 또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탁트인 전망이 장성 영광 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을 접수하고 3일 동안 머물며 휴식을 취할 때 농민군의 일부가 호산봉에 진을 치고 휴식과 재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호산봉 남쪽 아래 마을이 신촌인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서인수 등 13명이 김성철 접주집에 회동 손화중을 설득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 김성철 접주는 그 준비 공작금으로 쌀 50석을 내놓았으며 그의 아들 김홍섭은 전봉준 장군 수행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천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京軍)을 크게 물리치고 다음날 전주성을 향해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곳부터 남도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합류하게 된다. 말무덤(큰무덤) 뒷편의 오솔길이 영광 함평 목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또한 오솔길을 가다보면 오른쪽 산 밑에 바가지 샘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이 좋다. 농민군들이 숙영할 때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 접주의 집자리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손화중 피체지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손화중 포교 활동지 도소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으로서 황토현·황룡촌 전투의 승리에도 기여했으나,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김인배 추모비
김인배(1870 - 1894)는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의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영호대접주란 직책을 맡았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역과 연대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벌인 사례로 동학농민혁명에 기록되고 있다. 김인배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영호남 연합군이 순천에 본영을 두고 인근 광양현과 낙안군, 좌수영 지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하동과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