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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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토평비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관군이 동학농민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 1893.11.25~1895.9.21 재임)이 여러 장령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농민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짓고 글씨는 송재회(宋在會)가 쓰고 제액 전서는 송재면(宋益勉)이 써서 1895년(고종 32)에 세웠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90년 2월 2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진압구 초토영 우영터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5년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폭발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초토영이 설치된 곳으로 당시 이곳 우영터에서는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추포되어 힘없이 쓰러져 갔다.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금성면)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로서 1894년 4월 7일 담양수성군(守城軍) 鞠仁默(국인묵)은 정읍 고후 황토현 전투에 참여 하였다(금성산성에서) 라고 씌어져 있다. 연동사 뒤편에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금성산성은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적지로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 중부 일원에서 소집된 천여명의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의 장수 전봉준은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후일을 도모하였고, 이웃 고을로부터 식량보급의 지원을 요청하던 중에 순창의 쌍치면 피노리에서 부하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어 순국하고 만다. 희생된 전봉준의 뒤를 따라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은 이곳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격전을 벌이다 희생되었다. 그러한 고결한 순국의 흔적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이렇게 산성 아래에 비석을 마련해 둔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수북면)
담양지역에 언제 동학이 전파되고 동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담양이 전라도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을 받아들인 남원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1891년 이전에 담양에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담양 농민군의 동학 세력은 임실, 태인, 남원에 뒤지지 않았다. <천도교회월보 환원록>에 의하면 1892년에는 담양면 백동리(栢洞里) 김학원(金學元)과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 추병철(秋秉哲)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용면(龍面) 복용리(伏龍里) 전오봉(全伍奉)과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의 황정욱(黃正旭), 송구진(宋樞鎭)이 입도했고 1889년에는 고서면(古西面) 보촌리(甫村里) 최수선(崔洙善)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남응삼(南應三, 南周松), 김중화(金重華), 이경섭(李璟燮), 황정욱(黃正旭), 윤용수(尹龍洙), 김희안(金羲安), 이화백(李和伯) 등 접주들이 기포(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했다. 전북이 동학농민혁명의 근원지였다면 전남은 껴져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항쟁지였다. 담양은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옥과, 구례와 함께 농민군들의 배후 지원 장소였다. 또한 위기 때마다 전투력을 보강시켜주는 곳이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창평면)
창평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과정이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890년을 전후한 무렵, 이웃한 남원 등지를 통해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교조신원운동 시기에도 창평지역 교도들의 참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학사』에 따르면 제1차 기포시에 창평에서 백학, 유형로 등이 기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김낙철역사」에는 강재정(姜在貞)이 창평의 두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차 기포 당시 창평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확인되지 않으며, 집강소 시기에는 남원에 웅거하던 김개남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월 3일 대위 모리오 가이찌(森眉雅一)가 이끄는 일본군과 이규태가 이끄는 경군이 담양부에 도착하면서 담양 일대의 농민군에 대한 진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창평에서도 농민군 지도자 한충상(韓忠相)이 12월 6일 체포되었고, 농민군 백처사(白處士)·조공서(曺公瑞)·장영옥(張永玉)·하재원(河在元)·김봉철(金奉哲)·백준수(白俊水)·한성옥(韓成玉)·원만석(元萬石)·이석용(李石用)·강판석(姜判石)·정영운(鄭永云) 등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창평현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담양에서 놓쳤던 농민군 가운데 용구동의 우두머리 김형순(金亨順)·김문화(金文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창평(昌平) 용구산(龍龜山)에 은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담양부의 수성군을 출동하여 연일 용구산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우두머리들이 백양사(白羊寺) 등지로 도주하였다. 기념비에는 “12월 6일 접주 한충삼을 총살하고 백처사(白處士), 조공서, 장영옥, 하재원, 김봉철, 백준수, 정영운은 체포 투옥되었다”라고 쓰여있다.
동학혁명투사 현창비
전남 무안 출신으로 일제의 폭정을 제거하여 도탄에서 허덕이는 민생을 구하고 일본 등 외세를 물리치고자, 민족자주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제폭구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대한침략을 목적으로 반일세력인 동학군을 소탕코자 내침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신 여섯분(김응문, 김영구, 김덕구, 김효구, 김성권, 김용길)과 일본침략에 항거하였던 의병장 한 분 등 일곱 분의 고귀한 우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애국애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마을주민과 유족의 뜻을 모아 이 현창비를 세웠다.
김응문 장군 일가(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 현창비
전라남도 무안의 김응문 일가(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현창비이다. 김응문 일가는 일제의 폭정을 제거하여 도탄에서 허덕이는 민생을 구하고 일본 등 외세를 물리치고자, 민족자주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제폭구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대한침략을 목적으로, 반일세력인 동학군을 소탕코자 내침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의 고귀한 우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애국애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마을 주민과 유족의 뜻을 모아 이 현창비를 세웠다.
청천사(무안집강소)
1890년대 장흥, 보성, 완도 등 전라도 남부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이 무렵 무안지역에도 동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을 때 이 지역에서는 대접주 배상옥의 지휘 아래 동학농민군이 활동하였다. 1894년 5월 8일 ‘전주화약’ 체결 후 무안지역 동학농민군은 무안으로 돌아와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무안지역은 배상옥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무안의 동학농민 집강소가 설치된 장소는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의 달성배씨 사당인 청천재인 것으로 파악된다. 청천리에서는 배상옥, 배규찬 형제 외에 달성배씨 일족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배상옥은 전봉준·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군 주요지도자였지만, 갑오항쟁이 끝난 뒤 일제는 배상옥과 관련된 흔적을 철저히 지웠다. 친일파가 득세한 조선조정은 동학에 가담한 인물들을 배역자로 처단했다. 무안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을 지지하는 핵심세력이었다. 무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배상옥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 라 불릴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주요지도자였다. 배상옥은 무안대접주였으나 영광과 함평, 무안, 장흥, 해남, 강진, 영암지역의 동학교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전남지역의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무안의 배상옥은 전봉준·김개남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인물이다. 백산봉기부터 참여했으며 갑오년 12월까지 호남농민군들을 지휘했던 지도자였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삼의사숭모단
무안군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해주최씨 삼의사(최장현, 최선현, 최기현)를 기리는 비이다. 이 삼의사는 형제로서 무능하고 부패했던 벼슬아치들을 응징하고 더 나은 세계를 열기위해 고막포 전투 참전했다가 패한 후 고향에서 숨어 지내다 밀고로 나주 일본군 순사청에 끌려가 1894년 12월 27일 총살되어 순직했다.
장성 황룡전적지 기념탑
장성 황룡 전적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대한제국기 동학농민군 관련 전적지이다. 반봉건의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반외세의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29일 백산 봉기 이후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해 관속을 응징하였다. 4월 6일∼7일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철저히 참패시킴으로써 불과 한 달 만에 호남일대를 휩쓸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에게 군사 800명을 파견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영광에 머물고 있는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함평에서 나주·장성 등지로 향했다는 함평현감 권풍식의 보고에 따라 4월 22일 이학승·원세록·오건영에 병정 300명을 주어 장성으로 출발시켰다. 이튿날 23일(양 5월 27일)에는 황룡촌에 유진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때마침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관군으로부터 기습적인 포격을 받아 40∼50명이 희생되면서 진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망을 보고 있던 농민군은 경군의 숫자가 농민군에 비해 열세임을 확인하고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역습을 가하였다. 양쪽 진영의 거리가 가까워 포격전이 불리한 여건인데다 죽음을 각오하고 육박해오는 동학농민군의 돌격에 신식훈련을 받았다는 경군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계훈의 경군은 신식훈련을 받은 병정들이요, 또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이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오는 동학농민군에게 쫓겨 영광방면으로 도망하다가 5리쯤 나가서 신호리 마을 뒤 구릉에 이르렀다. 이때 대관 이학승은 후미에서 동학군과 최후로 항전했으나 전사하고 중요한 무기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경군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고 병정은 사기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관군을 30리 지경까지 추격해 ‘구르프포’ 1문과 ‘회선포’ 1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또 대관 이학승 이외에 병정 5명이 전사하였다. 동학군은 진중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竹)로 만든 ‘장태’ 수십 대를 산의 정상으로부터 내려 굴리며 사격을 가함으로 관군은 미처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시살(廝殺)을 당해 이효승·배윤환 2명과 관병 100명을 몰사시키고 대포 2문, ‘구르프포’·‘회선기관포’ 각 1문과 양총(洋銃) 100여 개를 빼앗았다. 동학농민군들은 이 장성싸움에서 얻은 대포와 양총을 거두고 북상해 정읍·태인을 거쳐 이 전투 이후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김한섭 재실(화수정)
화수정은 1860년 부산면 내동마을에 건립되었다. 1901년에 이곳에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과 오남(五南) 김한섭(金漢燮) 배향하는 흥룡단(興龍壇)을 만들었다. 김한섭(1838 - 1894)은 조선후기 『통화변답』, 『농정신서서조변』, 『오남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학문이 성취된 뒤엔 고향인 장흥(長興)과 금릉(金陵, 강진 별호)의 대명동(大明洞)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1877년에 강진군 월각산(月角山) 밑 대명동으로 이주했으며, 1882년에 그의 둘째 아들 김봉식(金鳳植)을 지도(智島)로 보내어 김평묵(金平默)을 찾아가 공부하게 하였다. 또 1883년엔 그의 스승 임헌회의 문집인 『고산문집(鼓山文集)』 간행을 위하여 오랫동안 고창(高敞)에 있었다. 「삼극도설(三極圖說)」·「유석심학부동변(儒釋心學不同辨)」·「일감문답(一鑑問答)」 등 성리학적 논저와 「벽사설(闢邪說)」·「통화변답(通貨辨答)」·「농정신서서조변(農政新書序條辨)」 등 정치적 견해를 담은 논문도 있다. 대체로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성즉리심즉기설(性卽理心卽氣說)·성위심재설(性爲心宰說) 등을 반대하고 명덕은 이(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이와 기의 합이며, 심은 몸의 주재자라는 견해를 주장한 것이 그의 성리학적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오남문집(吾南文集)』이 있다.
김한섭 유허비
김한섭(1838 - 1894)은 화서 이항로를 거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 배웠으며, 호는 오남(吾南)이었다. 장흥의 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838년 장흥 흥룡동(현 부산면 내안리)에서 출생한 오남 김한섭(吾南 金漢燮)은 1877년에 금릉 대명동(大明洞: 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대월마을)으로 이사하여 서재를 짓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7년부터는 보암면 수양리(현 신전면 수양리)로 옮겨 강학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2년 12월에 강진향교 장의(掌議)에 임명되고, 1894년에는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절교한다는 글을 다시 보냈다고 한다. 또한 4월부터는 동학 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박기현(朴冀鉉), 김병휘(金柄輝) 등과 향약계를 조직하고 동학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사람들을 효유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진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자 그 수장이 되어 민보군을 이끌었으며, 1894년 12월 7일 장흥과 강진, 북쪽에서 후퇴해온 농민군이 합공한 강진성 전투 당시 강진 수성군의 민보군 지휘자로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오하기문에는 “의병장 김한섭이 전사했으며 그 제자인 김형선(金亨善)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김용현(金龍鉉), 좌수 윤종남(尹鍾南), 현리 김봉헌(金鳳憲), 황종헌(黃鍾憲)도 같이 전사하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