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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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상주 동학교당은 동학 교리를 바탕으로 교당을 운영하고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동학의 남쪽 책임자인 김주희가 대한제국 광무 8년(1904) 동학계 경천교를 창립한 이후 1915년 상주에 정착하였다. 1916년에 교당을 완공해 1943년까지 포교와 동학 세력의 확장에 힘쓴 동학교 본부이다. 공사비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채웠고, 목재는 대부분 살림집을 헐어 재사용했다. 교당은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싼 분지 안쪽 2개의 하천이 만나 이안천으로 흘러가는 ‘亞’자형 지형 중앙에 남동향으로 세워졌다. 중심 건물인 원채, 동재, 서재, 남재 4동이 가운데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 모양을 이룬 초가집이다. 원채는 예배실과 헌성실을 비롯해 부엌과 방을 겹으로 배열했다. 동재는 중앙에 마루 좌우로 교주 김주희가 거처하던 온돌방과 손님을 접대하던 응접실, 가사를 판자에 새겼던 판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는 남녀 교도들이 머무는 건물로 부엌, 남녀 교우실이 있다. 남재는 중앙의 대문 오른쪽에 곡식 창고와 소를 기르던 마구가 있고, 왼쪽에는 부교주와 다른 지역에서 온 남교도들이 머무는 방이 있다. 원채를 제외한 동・서・남재의 방 앞과 뒤, 옆에는 툇마루가 있는데, 이는 각 건물의 앞면을 서로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 생매장 터 표지석
본 표지석이 놓인 곳은 동학농민군 열 한 사람이 생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당시 예천 동학농민혁명군은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왜를 무찌르자고 호소하였으나 보수 집강소 쪽은 오히려 갑오년 음력 8월 9일 농민군 열 한 사람을 붙잡아 이 부근에 생매장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이 사건은 예천 동학농민혁명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8월 28일에 북과 징을 치며 예천읍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기항 묘
전기항(1827 - 1900)은 경상북도 예천 사람이다.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8월 28일 화지 농민군과 함께 읍내를 공격하나 민보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민보군은 금당실 일대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불태우는 등 혹심한 보복에 나섰다. 이때 동학 수괴로 알려진 모량도감(募糧都監) 전도야지 전기항을 추적했으나 잡지 못했다. 전기항은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피신생활을 하여 금당실로 돌아갈 수 없었고, 손자 일호 대에 다시 돌아왔다.
최시형 집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1894년에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 형제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고광문(高光文, 1860.∼1898.5.8.)은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으로, 고경명의 다섯째 아들인 해사공 고유후(高由厚)의 후손이었다. 고광문의 두 동생은 고광인(高光寅, 1862∼1936, 자는 응선(應善), 고광룡(高光龍, 1867∼1938, 자는 응오(應五)이었다. 20대 말, 30대 초중반 나이 세 형제가 모두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고광문이 35세, 고광인이 33세, 고광룡이 28세 나이였다. 고광문은 동학군에 전 재산을 바치며 1백여 병력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화중·최경선의 부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894년 12월에 손화중은 부대를 해산하였으나 고광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열여섯살이 된 아들 고재언과 함께 곡성군 옥과면 용머리로 피신하여 은둔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광문의 후손은 이렇다. 고광문→고재언(高在彦, 1879∼1942)→고흥석(高興錫, 1910∼2000)→고영두(高永斗, 1930∼2006)→고병삼(高秉三, 1976년생, 생존)으로 이어졌다.고광문의 증손인 고영두가 선대의 유훈인 충정(忠貞)과 근면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고영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과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영두의 아내 정영숙과 아들 고병삼은 광주시 남구 이장동 216번지 일대에 있던 고영두의 땅 1500평을 국가에 기증하여,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조성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2017년에 완성되었다. 동학 3형제 가운데 고광문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심의를 거친 뒤에, 아래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아울러 고광문의 후손들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유족 등록이 이루어졌다. 전라도 광주지역과 그 주변 일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45명)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봉희, 강영희, 고광룡, 고광문, 고광인, 곽윤중, 김덕구, 김복환, 김용택, 김종태, 노병철, 문달현, 박병옥, 박용운, 손상옥, 오권선, 유광화, 윤주은, 윤태한, 이겸호, 이춘영, 이몽근, 이병기, 이성호, 이수갑, 이응범, 이의호, 이인숙, 이중전, 장경삼, 장공삼, 장옥삼, 전유창, 정일채, 정평서, 조승현, 조영운, 채봉학, 최성칠, 최윤주, 최장현, 최평집, 한달문, 허원, 홍자범 등이 있다.
최제우 순도비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건립된 천도교의 수도원이다.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1969년 09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1911년 가을에 2만 7946평의 밭과 임야를 구입하여, 1912년 여기에 건물을 세우고 그 이름을 봉황각이라고 하였다. 천도교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이 썼는데,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芾)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손병희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손병희는 또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이곳에서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 지명하여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1914년 4월까지 3년 동안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다. 손병희 자신도 1912년부터 7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천도교의 발전책과 구국운동을 구상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하였으며, 특히 3·1운동 때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여 3·1운동과 인연을 가진 건물이다.
최시형 순교 터 표지석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최제우 유허지 표지석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김한섭 비
김한섭(1838-1894)은 조선후기 『통화변답』, 『농정신서서조변』, 『오남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로 본관은 영광(靈光), 호는 오남(吾南)이다. 오남 김한섭은 본래 장흥 흥룡동(현재 부산면 내안리) 출신으로 1877년에 금릉 월각산 밑 대명동(현 강진 성전면 송월리)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진 보암면(현 도암면)에 거주하던 김한섭 도통장은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반대하였다. 도통장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의병장처럼 지역책임자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김한섭은 ‘경시적도문(적도에게 경고하며 내보이는 글)’이라는 글을 보내 동학의 궐기를 반대하였으며 제자 수십명을 모아 강진 읍성 서문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동학농민군 대장이었던 이방언과는 고산 임헌회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김한섭은 스승인 임헌의의 『고산문집(鼓山文集)』 간행에 힘썼던 성리학자로 명덕은 이(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이와 기의 합이며, 심은 몸의 주재자라는 견해를 주장한 저서가 그의 『오남문집(吾南文集)』이다. 이 책은 현재 도난우려 등으로 방촌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해오고 있다. 오남 김한섭 도통장의 죽음 후 그의 강학을 들었던 제자들과 유림, 그리고 후손들이 부산면 내안리 뒷산에 흥룡단이란 단향을 조성하였으나 직계후손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중단됐다. 한편 제자들이 뜻을 모아 비석을 세운 것이 지금 강진 신전면사무소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송연호 묘
송년호(1844-1908)는 여산 본관이며 고흥군 점암면 연봉리 출생으로 호는 수암(洙菴), 자는 재국(在國)이다. 고흥 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1890년 무렵인데 1891년, 정영순(丁永詢)과 동학에 입도하였으므로 최초 입도자 중 하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고흥에서는 송년호를 비롯하여 유희도, 구기서, 정영순 등 4인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북 부안의 백산성으로 진군하였으며 같은 해 전주 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되었고 고흥 집강소가 조직되었다. 2차 기포 후 1894년 말까지 고흥 동학농민군은 10여 차례 고흥을 공격하였는데 농민을 이끌던 유복만과 오준언 등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송년호는 체포되어 나주로 이송되는 중 탈출하여 활동을 이어가다 1908년 사망하였다.
섬거역전투지(동학정)
과양시 진상면 섬거리 622-1 동학농민군 섬거역전투지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이다. 동학농민혁명당시 농민군과 일본군, 관군, 민보군 사이에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농민과 마을 주민들이 일본군, 관군, 민보군에 의해 전사하거나 처형된 곳이다. 섬거역(蟾居驛)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갈 무렵 이 일대의 농민군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많은 희생을 당한 곳이다. 섬거마을도 동학교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역시 관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