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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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론 동학유적지
이곳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 전거론(全巨論)은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1897년 8월부터 1898년 1월까지 5개월간 은거하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강원도와 경기 북부, 경상도 일원의 산간 마을을 전전하다가, 제자인 임순호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모시게 되었으며,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 「이심치심(以心治心)」 등의 법설을 펼쳤다. 또한, 1897년 12월 24일 의암 손병희에게 동학의 도통(道統)을 전수한 곳이자, 최시형의 차남이자 항일투쟁에 앞장서며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2년 형의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인 최동호(崔東昊, 1897~1923)가 태어난, 유서 깊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최시형 묘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최시형 기념비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 발상기념비
천도교 진주시교구는 1894년 4월(음력) 초순께 시천면 내대리에서 백낙도 대접주(大接主. 동학농민혁명의 대단위 조직인 포의 책임자)를 중심으로 500여 명의 동학농민들이 봉기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백낙도 대접주는 보름여 만에 관군에 체포돼 참형을 당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의령, 사천, 고성, 남해, 함안, 진주 등 서부 경남지역으로 확산했다. 주탑은 천지인(天地人) 3단으로 하늘과 땅, 사람이 우주와 일체임을 형상화했다. 좌우 보조 탑의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은 당시 농민 혁명군의 슬로건이다. 높이는 1894㎜로 1894년 봉기한 것을 상징했다. 뒷쪽 원기둥은 동학농민혁명과 조선 정부에 대한 폐정개혁 12개조를, 주탑의 횃불 모양은 내대리에서 동학농민 횃불이 오른 것을 각각 형상화했다. 2010(포덕 151)년 11월 13일 천도교 진주시교구 주관으로 실시한 진주지역 인내천 강좌를 계기로 이곳 내대리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하였고, 이후 천도교 진주.사천.삼천포.고성.통영교구 등 경상도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추모식 및 합동시일예식을 매년 봉헌하였다. 2014(포덕 155)년 9월 학술 강연회를 개최하여 이곳 내대리가 영남지역 최초의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임을 확인하고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촉하였다. 추진위원들의 정성과 산청군의 지원으로 2015(포덕 156)년 10월 20일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발상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1894년에 궐기한 동학농민군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고자 세워진 사적이다. 1894년 경상남도의 농민군은 고성산성에서 집결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현장에서 농민군 수천 명이 죽었다. 그러나 일본군 보고서에는 186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쓰여있다. 고성산성은 당시 순수 동학혁명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곳으로, 고성산 능선을 따라 곳곳에 암벽이 남아 있고, 정상부근에는 동학혁명군이 축조한 석루와 혁명군 지휘자들이 군사회의를 개최한 듯한 탁자와 의자 모양의 돌 유적이 존재한다.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높이 15m의 첨탑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첨탑은 고난과 시련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 탑 하단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잘 정리하여 새겨놓은 비문도 함께 볼 수 있다.
용담정
용담정(龍潭亭)은 동학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무극대도(无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곳으로 경주 구미산(해발 594m)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용담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가정리 최제우 유허지)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10세 되던 해에 모친, 16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읜 후 무예를 익히거나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구도하다가 1854년에 부인 박씨의 고향이기도 했던 울산 유곡동(여시바윗골)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도에 정진하였다. 여기서 금강산 유점사에 왔다는 이승(異僧)으로부터 이른바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는 기연을 얻기도 했으나, 득도하지 못한 채 1859년 10월 경주로 돌아와 이곳에서 기거하며 득도하기 위해 정진하였다. 이곳의 부지는 최제우의 조부 최종하(崔宗夏)가 그의 아들 최옥(崔鋈)의 학업을 위해 매입하였으며, 1815년에 최옥이 이곳에 용담서사(龍潭書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울산에서 경주로 돌아온 최제우는 이곳을 용담정(龍潭亭)이라 하고 득도를 위해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온몸이 떨리고 신선의 말씀이 들리는 신비체험을 하면서 득도에 성공하여 동학이 창도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제우 묘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갑오전쟁 선산 창의비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고 일본군은 보급과 통신의 요충지인 병참소가 언제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의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면 곧장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그 세력을 위축시키고자 하였다.선산 가까이에는 해평과 낙동 두 곳에 일본군 병참소가 설치되었다. 선산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선산성을 점령한 것은 9월 20일 이후 무렵이었고, 여기에는 김천지역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선산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선산의 향리들이 몰래 낙동의 일본병참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일 선산성을 점령해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김천의 접주 김정문 휘하의 농민군 15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선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선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낙동병참두의 병력과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부대였다. 후지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을 이끌고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일대의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그의 부대는 9월 29일 상주성을 공격하여 농민군을 몰아낸 이틀 후인 10월 1일 다시 선산부를 공격한 것이다. 현재 자료상 확인되는 선산농민군 지도자로는 신두문(申斗文)이 있다. “거괴(巨魁)”로 표현되던 그는 11월 10일경 선산부에 체포되었으며, 선산관아에 수감되어 있다가 12월 14일 상주 소모영의 소모사 정의묵에 의해 총살되었다.〈갑오농민군 선산읍성 전적비〉 및 〈갑오전쟁선산창의비〉는 이러한 선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의 기념하여 세워놓은 것이다.
한정교 기념비
1894년 한교리의 지도와 한정교의 돌격아래에 선산갑오전쟁농민군이 일본군 최대탄약기지 병참부를 야습했다. 일문삼대 한교리, 한정교, 한중석은 모두 항일투사로 활동했으며 특히 한정교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한정교 추모비
1894년 한교리의 지도와 한정교의 돌격 아래에 선산갑오전쟁농민군이 일본군 최대탄약기지 병참부를 야습했다. 일문삼대 한교리, 한정교, 한중석은 모두 항일투사로 활동했으며 특히 한정교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한문출 피신지, 한중석 은거지 표지석
선산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침탈 야욕에 날뛰던 야만적인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다. 음력 11월 초, 선산읍성을 점령한 왜군을 격퇴하고자 선산갑오동학농민군 총지휘자 한문출 장군은 격렬하게 전투를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국의 현대식 강력한 신무기에 밀려 이곳 죽장사에 피신하였다. 이런 이유로 죽장사는 일제강점기 온갖 탄압을 받아 절간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의 위기를 겪었다. 1943년 항일독립투사 한중석 선생은 일본 경도경찰서 경도계에 연행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저항을 하여 거의 폐인이 되었고 죽장사에 은거 요양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 했다.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이 봉기를 준비하여 1894년 5월 무렵부터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영사관에서는 5월 10일 경상도 선산, 상주, 유곡 등이 ‘동학농민군의 소굴’인 것으로 파악했다.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상주관아를 점령한 시기는 1894년 9월 22일경이다. 그러나 9월 28일 낙동병참소의 일본군의 공격으로 100여 명의 농민군 희생자를 내고 상주에서 후퇴하였고, 1894년 10월 이후부터 상주의 동학농민군은 상주 소모영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처형된 인원은 총 42명으로 파악된다. 1996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고, 상주시, 상주시의회, 상주농민회, 상주산업대학교 등 각급 민간단체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상주산업대학 맞은 편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상>을 건립하였고, 2008년 도로공사 중 기념상이 훼손되어 현 위치에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비>를 재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