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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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태안 원북면 방갈리 출신 문장로(文章魯, 1846~1919)는 1893년 2월 초 박덕칠을 통해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후 적극적인 포덕활동을 전개하여 방갈리의 접주가 되었다. 박인호가 이끌던 덕포의 기포령에 의하여 30여명의 동학 우두머리를 구출하기 위한 비밀회의가 방갈리에 살던 문장로의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이후 그들은 논의대로 태안관아를 점령하여 동학의 우두머리 3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면천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에 태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대거 이끌고 참여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9일 홍주성에서 패한 이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태안일대 해안의 토굴과 야산에 은신하면서 예포 동학 조직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동학의 지도부들이 지시한 조직 강화 밀명을 받고 태안 수접주로 임명되어 조석헌 등과 함께 비밀스럽게 조직 재건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로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충남의 각 지역을 떠돌면서 포교활동을 벌이다가 1910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무한천변의 갈대밭으로 이주하여 천도교의 포교 활동뿐 아니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기포지로 알려진 태안군 원북면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5년에 본 비를 세웠다.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1차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압송했다. 또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목숨을 바쳐 동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기리고자 본 탑을 건립하였다.
칠의비
1894년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의 갖가지 모순 속에서 심한 흉년과 가난으로 고통 받던 농민들이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 배격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들과 뜻을 같이하여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퍼지던 때, 홍주지역에서도 수많은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내포 동학군은 홍주목의 중심인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홍주성 인근에 속속 모여 들었다. 당시 홍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력은 최정예 일본군 40명과 관군 400명, 그리고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붓을 던지고 칼을 들어 목숨을 버린다는 유교정신이 몸에 배어있는 홍주유생 천여 명이 고작이었다. 이 때 동학군은 홍주성 전체를 포위하고 있었고 홍주향교를 지휘본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향교에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향교를 지키려는 7명의 유생들이 있었는데, 오경근 최민지 방세응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많은 유교서적이 있는 서재를 지키려 하였고, 탐관오리와 양반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동학군들이 유생인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맨몸으로 항거하다 죽음을 맞았고, 문묘와 서적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향교 건물은 지켜낼 수 있었다.
홍주동학기념비
오관리 세광아파트와 목빙고 옆에 있는 홍주동학기념비, 홍주동학군은 이곳 고지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있는 홍주성을 공격했다. 1895년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2월까지도 동학도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홍주의 동학군들은 예산으로 진입해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다리(삽교)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했다고 한다. 1985년 11월 6일의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덕산의 삽교천변에 이르러서 보니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섬도 널려 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을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27일 오후에 발진하여 동군 덕산(德山)의 역촌 뒤뜰에서 유숙하고 익일은 즉, 28일은 대신사주 탄신기도일이라 역촌 후일에서 기도하고 즉발 홍주군(洪州郡)”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관군들은 해미에서 덕산을 거쳐 홍주(洪州)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는 연전연승한 동학군이 27일 저녁에 덕산에 진출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홍주성(洪州城) 공격을 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담유사 간행지 표지석
용담유사는 천도교경전으로 이곳 단양군 샘골(南泉洞)은 천도교 제1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이 지은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처음으로 간행한 뜻깊은 곳이다. 제2세 교조 신사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은 수운 선생의 명교에 따라 경전(經典)을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18년간을 미루어 오다가 1880년에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마치고 1881년 단양군 장정리에 은신하시던 최시형은 이해 5월 이곳 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간행소를 설치하여 6월 드디어 수백권의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되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신사의 거룩한 덕업을 기리기 위하여 해월신사 순도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용담유사를 간행한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사회개혁운동이다. 보은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1월 장내리(현 장안면)에 동학교단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곳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전국의 동학도를 규합한 보은취회가 열렸다. 최대 3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회에서 그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라는 정치적 기치를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였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자 동학농민군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충청, 경기, 강원,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이 보은으로 집결했고 곧 전봉준의 호남 농민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금치전투에서 밀려나 해산되었고,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던 혁명군은 보은 북실마을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참히 학살당한다.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항전이었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보은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종결된 곳이다.
보은 동학최후7인 학살 매장지
동학군들은 구 속리산석재 뒤 둥글레봉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장안 구인리에 주둔하며 동학군을 치기 위해 밤 10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월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은 김소천가와 지막골(금학동)에 막사를 지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은 구인리에서 오창→누청→강신→성족→종곡리로 쳐들어갔고 동학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란 동학군들은 마을 밖으로 달아났지만 일본군을 추격해 요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동학군들이 반격하며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동학군은 새벽까지 몇 번을 역습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18일 오전에는 종곡부근 고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일본군에 절대 밀리지 않으며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동학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부쳤다. 동학군의 제1선이 취약해져 급기야 저지선이 무너졌고, 동학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동학군들은 몰살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2천 600여명에 달했으며 그 때가 12월 18일 오후 3시였다.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퇴로를 찾아 수철령을 넘고 북암리 터골을 거쳐 괴산, 강원도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암리 부내실로도 10명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말티재를 넘어 북암리로 뒤쫓아온 일본군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동학도를 색출했다. 여기서 꼬리를 밟힌 7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내실 주민들이 하인이라고 둘러대는 등 신분을 감춰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7명의 시체는 부내실 주민들이 집단매장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부내실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 확인한 것이다. 6월 3일에는 집단매장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넋을 위로한 바 있다.
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안내판은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마을에 위치해있다. 이곳에는 1893년 3월 동학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여 쌓은 돌성의 자취가 있다. 1893년 3월 11일(음력)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 아래 최소한 2만 3천 여명의 동학교도인들이 이곳에 모였다. 동학의 세력이 커져가는 만큼 박해도 심해져만 갔다. 조정에서는 동학을 사교로 단정하고 교도들을 역도비적으로 몰아 붙이며 더욱 탄압을 강화했다. 관리들은 이를 빌미로 교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을 빼앗는등 패악을 일삼았다. 이처럼 교도들의 처지가 참담한 지경에 빠지자 생존을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동학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 였다. 1892년 12월 6일 보은장내에 동학 총본부인대도소를 설치하고 조정을 상대로 한 신원운동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장내는 갑오년농민 전쟁이 막을 내릴 때 까지 혁명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광화문앞,복합상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탄압이 여전하자 청산에 머물고 있던 최시형은 1893년3월10일, 교도들에게 ‘장내로 모두 모이라’는 통문을 띄운다.이로써,동학사의 중요한 사건인 보은 취회가 열린다.3월10일 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취회에는 최시형의 통문을 받고 각지에서 모여든 교도들로 장내리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 수가 2만이라고도 하고, 3만에 달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옥녀봉 아래 대도소를 중심으로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장내를 동학의 구심점이자 성지로 만든다. 하지만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임금에 대한 모반으로 곧 역적 죄였다. 더구나 잘 조련되고 무장된 관군에 비하면 동학도들은 땅을 파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죽창과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다. 결과가 분명한 싸움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고, 동학교도들부터 해산하기 시작해 4월 2일에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들도 물러났다.
갑오동학농민혁명전적지비
1894년 10월 29일 충북 옥천 증약 부근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나, 정확한 전투지 위치는 알 수 없다. 2009년에 옥천 증약전투 참여 유족과 옥천향토사연구회에서 ‘갑오년동학농민혁명전적지’ 기념비를 옛 증약역 인근에 건립하였다. 1894년 10월 29일 일본군 제18대대 하사 이하 17명과 교도중대 1개 소대는 회덕을 출발하여 주안으로 가는 도중, 옥천 증약 부근에서 동학농민군 1만여명을 만나 교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깃발 50여개를 앞세우고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협공하였는데, 동학농민군 110여 명이 쓰러지고 관군은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동학농민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적군은 적다. 포위하라”고 외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낸 뒤 문의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일본군이 쏜 탄약은 1,432발이었다.
동학혁명군 재기포 기념비
동학혁명군 재기포 기념비는 충북 옥천에 있으며, 천도교 교조 최시형의 보국안민 정신을 널리 퍼뜨리기 위함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본받자는 취지에서 건립된 비이다. 청산현은 동학농민혁명 때 천도교 제 2대 교조 최시형이 전 동학군에게 항일전에 나서도록 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린 곳이다. 동학군들은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11월 8일에는 청산에 모여 대회를 열었고, 손병희는 논산으로 출동하여 11월 13일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호남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11월 17일 경천점으로 진출하여 이인에서 관군을 물리치면서 공주성을 공격해 들어갔고, 동학군은 12월 7일 적의 기습을 받아 수많은 희생을 당했으며, 1월 19일 음성 금앙시 되자니에서 최후의 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려야 했다. 비록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동학농민혁명은 성사되지 못했으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갑진개혁, 의병활동, 3.1독립만세운동 등으로 퍼져나갔다.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안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비는 충북 옥천에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인 장소인 한곡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가 세워진 한곡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의 2세 교조 최시형이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전국의 동학도를 지휘하던 지역이다. 또한 1894년 9월, 전국 동학군에게 총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 장소이다. 1893년 10월 이래로 이곳에서 제자 의암 손병희와 김연국 등 동학도들을 지도하였고, 이곳에는 최시형의 집이 남아 있고, 문바위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새긴 이름 등이 남아 있다. 기념비는 힘차게 전진하는 옥천군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동학농민혁명 횃불을 형상화하기 위한 모양으로 제작되었고, 개혁 민족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헌표 공적비
이헌표(1841-1909)는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년에 접주를 하였으며, 이후 여러 지역의 접주를 하다가 1905년 정월에는 충청도 수접주의 대임을 받았다. 1899년 동학농민혁명이 분기하게 되었고 충청도 전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크게 발호하였는데, 최시형 교주는 이헌표 접주에게 동학혁명군을 구원하도록 명했고, 이헌표 접주는 즉시 창의기병하여 1896년 보은 장내리와 종곡리 등 전투현장에 수백명의 원군을 보냈는데, 동학혁명군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전지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들의 유족들이 가족의 생환과 보상을 강청하였고, 관아와 조정에서는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혁명단심과 포교를 통한 개혁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자 교세가 날로 확산되어 가고 민심과 천심이 개혁의 편에 서게 되자 이를 질시한 사람들이 이헌표를 질시하였고, 이로 인해 1903년과 1904년에 억울하게 악형과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