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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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전적지 송장배미(용못)
송장배미는 1894년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에서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로 인해 논이었던 용못에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송장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기포지 기념비
동학농민혁명기념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초등학교 정문 옆 제원역터에 위치해있다. 이 기념비는 1894년 3월 8일 금산 제원역의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무장기포지를 기념하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민중화 운동이었다. 이 혁명은 낡은 신분제 아래 지방 관리의 과도한 농민 수탈로 인해 촉발되었으며,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서구 세력과 개신교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창시한 민족 종교인 동학에 뿌리를 두고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으나, 1895년 금산 대둔산에서의 항쟁을 마지막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의 근본 정신은 한국인들에게 평등과 저항의 정신을 불어넣었고, 이 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무장기포지이자 최후의 항쟁지인 금산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기념비는 이러한 소중한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목숨을 바쳐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동학농민군 승전목 전투지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승전목은 면천면 면천로와 당진읍 도곡길 사이의 좁고 가파른 계곡으로 어떤 병력도 통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1894년 11월 21일 한명순, 이화심, 박용태, 김현구 등이 이끄는 내포 지역의 2만여 명의 동학군이 10시부터 15시 30분경까지 총과 화전으로 아까마즈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89명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동학군 3명이 전사하였으나, 일본군의 78명분의 배낭, 상하 겨울 내의, 밥통, 구두, 쌀자루와 휴대식량 321식분, 탄약 612발 등을 손실시키는 결실을 이루었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이후 면천읍을 점령하고 22일 예산군 고덕면 구암포까지 공격했다.
김병돈 충절전망비
천주교 해미 순교 성지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여숫골에 위치하며, 천주교 박해 관련 사료와 사적이 위치한다. 또한 이 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증군무참의김공병돈충절전망비(贈軍務參議金公秉暾忠節戰亡碑) 또한 이 곳에 있다. 증군무참의김공병돈충절전망비는, 서산과 해미 일원에서 동학 농민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한 군관 김병돈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증 군무참의(贈軍務參議)란 전사 이후 조정에서 군무참의를 추증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초토사였던 홍주 목사 이승우를 따라 종군했는데 1894년 10월 24일 전투 중 전사했으며 이 비석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현장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석이 들어선 선장 노을포 공원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창현에 속한 선장포구와 장터였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로 봉건체제 타파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해 동학농민군이 기포(봉기)한 곳이다. 아산의 동학혁명은 음력 10월 5일 아산관아를 점령하고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동학농민군 접주(지도자)는 곽완, 김경삼, 이신교, 정태영 등으로 이후 정태영 아들 정수길(규희)은 1919년 3.1운동 때 선장 장터에서 4.4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894년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전국 120여개 군현에서 봉기, 조선 관군과 지배층의 군사력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나 조정이 청에 원병요청을 했다가 일본에 장악된 후 친일내각으로 인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특히 아산은 백석포에 진주한 일본군이 청을 격파하고 그 위세를 더해 직접적인 고통을 가해오자 반외세(反外勢), 척왜(斥倭)의 분위기가 크게 불타올라 동학농민군이 9월 초부터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2차 기포를 시작했을 때, 아산지역 백성들도 함께 봉기했다. 아산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당시(음력 10월 5일) 아산현을 혁파하는 등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처절히 싸웠으나, 결국 일본군에 장악된 조선 친일내각과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혁명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항일투쟁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포대도소 터
예포대도소는 개항기의 내포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던 대도소이다. 박인호의 막골기포에 의해 1894년 9월 29일 내포 전 지역에서 동학에 의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박인호, 박덕칠 등 지도부에게는 향후 전면전에 대비한 무장투쟁 계획을 수립하고 조직적 활동을 총지휘할 대도소가 절실하였다. 덕의대접주 박인호는 기포령을 내린 후 농민군을 규합해 현 삽교읍 지역에서 가장 큰 성리(城里)마을에 있는 덕산군 장촌면소를 점령하여 진을 설치하고서 ‘예포대도소’라 칭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지휘본부로 활용하였다. 예포대도소에서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 확보 계획을 논의하여 해미, 덕산, 온양관아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전면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예포대도소에 모인 3,000여 농민군은 각 지역 포(包) 중심 단위로 모여 지휘 체계가 서지 못하고 조직적인 군율이 없었다. 이에 1894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홍주목사 이승우의 관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퇴하였다. 예포대도소는 물론 성리마을 전체가 동학농민군 소굴로 지목되어 모두 불태워졌고 동학농민군이 확보했던 군량미와 소금 등을 관군에게 빼앗겼다. 예포대도소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예당평야의 중심부에 있는 전형적인 평야지 농촌마을이다.
동학농민군 우물터
예산, 덕산, 태안, 서산, 해미 지역 등 내포지역 농민군은 1894년 9월 그믐에 기포하여 10월 1일 태안·서산관아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은 호연초토사로 임명된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유회군, 또 10월 1일 도착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목소리 대도소, 해미와 광천 등지에서 패배하여 기세가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10월 24일 승전곡 전투와 10월 26일의 신례원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물리친 후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홍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신례원에서 홍주를 향해 전진하였다. 당시 홍주성 공략에 나선 농민군의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10월 27일 예산으로 진입하여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 쪽으로 이동하여 역촌(현재 삽교읍 역리와 송산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다. 11월 6일 이 지역을 지나던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은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단도 널려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하여 농민군의 수가 매우 많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당시 역리 마을 옆에서 주둔하던 농민군들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바로 이 우물에서 길어다 사용했다고 한다. 역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한 농민군들은 1894년 10월 28일 오후 1시경 홍주성을 향해 진군하여 오후 4시경에 홍주성 외각에 당도하였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의 홍주성 공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저항을 뚫고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투인 홍주성 공방전이었다.
동학농민혁명 관작리 전적지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관작리전적지 표지석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동학유적지가 아닐수 없다.
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
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는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내포 동학혁명기념탑
예산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예산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평등과 평화 등 내포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내포 동학농민혁명 최대 집결지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동경대전 목천판 간행터
동경대전은 조선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한문으로 작성한 천도교경전, 동학경전이다. 동경대전 목천판 간행지는 김은경(金殷卿)의 집터로 최시형(1827~1898)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동경대전』을 목판으로 간행한 자리이다. 동학이 충청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김은경의 집에 간행소를 마련하고 『동경대전』 1천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핵심 사상인,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인류 최초로 본원적 평등사상을 연 진리이다. 『동경대전』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화와 균형을 삶을 이루고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하였고, 이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성산전투 희생자 위령비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병한 청·일 양군이 철수하지 않고 서로 충돌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또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우리 정부에 갑오개혁을 강요한 것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이 재차 봉기하여 세성산전투가 일어났다. 11월 초순 논산 소토산 근처에서 합류하여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규모 연합부대를 구축한 동학농민군은 서울 진공을 위한 1차 목표를 공주로 정하고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북상하던 동학농민군들이 공주를 진격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 공주 외곽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이 견고하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로 공격의 기회 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목천 등지에서 기포하여 이 고을의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한 북접계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김복용을 중심으로 목천 세성산에 진을 쳤다. 한편 일본군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섬멸할 목적으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를 급파하였다. 그리고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3로로 나누어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남하하여 공주지역을 점령한 뒤 포진하였다. 공주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관군은 배후의 위협 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목천 세성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일본군과 관군은 2개 소대 병력을 세성산 북쪽 기슭에 매복시키고, 1개 소대를 동북편 산 위에 대기시킨 후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세성산 동남 기슭에서부터 기습 공격하였다.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유리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동안 저항하였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데다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두 시간 만에 서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던 동학농민군은 북편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의 습격을 받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궤멸되었다. 세성산전투의 패배는 농민군의 전략과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접의 우수한 전투부대가 궤멸되었을 뿐 아니라 지리산 요충지역의 상실과 함께 관군의 병력을 공주성 수비에 집결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투의 패배로 농민군 지도자 김복용이 현지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했으며 김화성을 비롯한 지도자들도 세성산을 빠져나왔으나 모두 체포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농민 370여 명이 죽고 700여 명이 다치는 등 농민군의 희생이 컸다. 이러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공로를 기리고자 갑오농민전쟁 세성산전투 희생자위령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