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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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농민군의 상
정읍의 황토현은 동학농민혁명이 첫번째 큰 승리를 거둔 장소이자 동학농민혁명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정읍역 광장에 세운 동학농민군의 상이다.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말목장터
말목장은 부안과 태인과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형성된 시장으로 배들평야의 농산물과 부안 줄포의 수산물이 거래되던 큰 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봉기(1894.1.10.) 당시,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수 천 명의 배들평 농민과 동학교인들이 모인 곳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현한 동학농민군의 첫 집결지이다. 수천의 군중이 이곳에 모였을 때,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감나무 아래에 서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을 설명하고 이에 맞서 봉기할 것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수천 군중이 호흥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니, 바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봉준 집(정읍)
1878년(고종 15년)에 지어진 남향 초가집으로,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 전봉준(1855 - 1895)이 살던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이 나란히 일자형으로 있는데, 이는 남부 지방 일반 민가의 구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 등을 지내며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농민군 김도삼 사당
김도삼은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29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 호는 도삼 자는 치대이며, 1856년 1월 18일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태어났다. 1893년 11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봉준, 장익서 등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보세감면 진정서를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혁명 결의의 내용을 각 리 집강에 보내기 위하여 비밀 통문을 직접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의 한 사람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만석보 혁파비
만석보는 개항기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했다.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 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
고부농민봉기 기념 상징조형물
고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옛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 이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 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혁명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기념하고자 본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는 개항기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했다. 조병갑(趙炳甲)은 고부에 부임하여 멀쩡한 보 아래 새로운 보를 쌓기 위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부역을 시켰다. 보가 완성이 되자 수세(水稅)라는 명목으로 보세(湺稅)를 받았는데, 한 두락에 상답은 2두, 하답은 1두씩을 받아 예동·두전·백산에 700여석을 쌓아놓았다. 이로 인하여 1894년 정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때려부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1973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 비를 건립하였다.
만석보 시비
만석보 터는 현재 지방기념물 만석보 제33호이다.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만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최경선 묘
최경선(1859 - 1895)은 동학농민혁명 5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이다.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1894년 정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부민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동학교도 300명을 집에 집결시켰다가 고부농민 1,000여 명과 합세해 고부관아를 습격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제1차 농민봉기 백산(白山)에서 농민군을 조직할 때,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돌아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할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한편, 5월 7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7월에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접주 오권선(吳權善)의 군대와 합세하여 총공격을 단행했으나 집강소 설치에는 실패하였다. 8월 13일 전봉준이 단신으로 나주성에 입성해 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해 집강소 설치가 가능해지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진 그 해 9월에 제2차 농민군봉기가 삼례회의(參禮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전봉준을 수행, 정읍·장성·담양·동복·벽성 등지로 순행하며 농민군 봉기를 독려하는 한편,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우금치에서의 패전 이후 12월에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수성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孫華中) 등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개화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동학군 태인전적지
태인전적지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맞서, 1894년 음력 11월 27일(양력 12월 29일)에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곳으로 전봉준 장군이 지휘한 최후 전투지이다.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 장군은 논산과 전주를 거쳐 원평 구미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이곳 태인에서 재기를 위한 항전을 준비하였다. 전봉준 장군과 김문행(태인접주) 유공만 문형민 등 지휘부는 3천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오전 10시부터 약 10시간에 걸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동학농민군은 40~50명이 생포당하고 30~40명이 전사하였으며, 희룡포 15정, 조총 200여 정, 다수의 탄약과 죽창, 말 6필 등을 노획당하고, 고부와 남원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 이곳 태인은 1894년 당시 태인현의 관아가 있던 중심지였으며, 동학농민군 김개남 총관령과 최경선 영솔장의 출생지이자 활동지였다.
조규순 영세불망비
1894년 당시 고부 군수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원흉이 되었던 조병갑이 당시에 군민의 원성을 뒤로 하고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조선시대에는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 하기도 했다. 황현(黃玹, 1855―1910)이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했고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조병갑은 태인 현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운다며 1,000냥을 고부군민에게서 뜯어냈다. 이미 설치된 ‘만석보(萬石洑)’ 아래 다시 ‘보’를 설치해 억지로 물값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면세를 조건으로 황무지 개간을 허락해주고는, 나중에 말을 바꾸어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돈 많은 백성들에게 불효, 음행, 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은 후일 동학농민혁명으로 체포된 후 전봉준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봉준은 조병갑이 만석보의 축조 및 부친 조규순의 송덕비 건립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노동력과 비용을 부담시켰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과도한 세금 징수, 협박 및 무고, 비리와 착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우금치 전적지,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공주를 중심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